[일사일언] 전화가 무서워요

이진혁 출판편집자 2023. 5. 1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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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2016년 5월, 오후의 정적을 깨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채식주의자인데 말이야.” “네?” “30년 넘게 채식해온 나도 가만있는데 젊은 여자가 뭘 안다고 책도 쓰고 상도 받았어?” 아찔하다. 그토록 짧은 한마디가 이토록 부적절하기도 힘들다. “그러니까, 그 책은 채식 생활에 관한 책이 아니고요….” “채식에 관한 책이 아닌데 왜 제목이 채식주의자야?” 끝이 없다. 전화를 어떻게 끊을지 고민해봤으나 답도 없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상대방의 말이 소진될 때까지 듣고 있는 수밖에.

2023년 5월, 지금까지도 이러한 전화는 잊을 만하면 걸려온다. 중국 고전에 통달했으니 자기 시집을 내달라는 전화(인과관계라고는 찾기 힘들다), 본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그런데 왜 기사 한 줄이 안 날까), 출간 안 해주면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실제로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화를 낼 수도 끊을 수도 없는 노릇. 할 수 있는 건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러다 보면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놀랄 때가 있다. 중요한 전화, 잘못 걸린 전화, 별것 아닌 전화, 악성 민원 전화 등 온갖 경우의 수가 수화기를 들기 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른바 전화공포증이다. 2020년 한 취업 포털이 조사한 결과, 무려 성인 53.1%에 이르는 사람이 전화 공포를 경험했다고 한다.

“따르릉.”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긴장하고 받았더니 광고성 연락이었다. 울컥 짜증이 나서 언성을 높인다. “도대체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걸었어요?” 빽 내지르고 나니 스쳐가는 생각. 상대방은 이런 반응이 몇 번째일까. 전화를 걸기 전에 얼마나 식은땀을 흘렸을까. 어쩌면 전화 공포란 받는 쪽 말고 거는 쪽에도 있는 것 아닐까. 사람 목소리가 무서운 세상이라니 참담하지만 말만큼 무서운 것도 없음은 동서고금의 진리, 역지사지로 말조심을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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