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기상 서린 ‘범천’, 일제 때 ‘동천’ 된 게 그냥 우연일까
- 1740년 ‘동래부지’에 나오는
- 지역 다섯 교량 중 하나 범천
- 부산의 허리였던 신성한 지형
- 호시탐탐 침략기회 노린 왜에
- 범 이름 빌려 경고한 것 아닐까
- 1899년 지도에도 엄연히 범천
- 1900년대 갑자기 명칭 바뀌어
- 흔하디흔한 ‘동천’으로 격하
광제교 이섭교 대천교 탄천교 범천교. 1740년 발간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나오는 부산의 다섯 교량(橋梁) 명칭이다. 다섯 가운데 넷은 동래를 둘러싼 온천천과 수영강에 있었다. 동래읍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서 3리 아니면 5리였고 해운대로 이어지는 탄천교만 10리였다. 그런데 다리 하나만 멀찍이 떨어져 외따로 있었다. 그게 범천교였다.
‘재부산거이십리(在釜山距二十里)’. ‘동래부지’ 범천교 설명이다. ‘부산에 있고 (동래부에서) 20리 거리다’ 그런 뜻이다. 여기서 ‘부산’은 동평면 부산성내리(釜山城內里)를 이른다. 동평면에 옛날 성터가 있었으니 성터 안쪽 어디다. 지금으로 치면 부산진구 당감동, 가야동 일대다. 그 일대를 지나서 동구 범일동으로 흐르는 하천이 범천이었고 거기 다리가 범천교였다.
범천(凡川)은 지하철 역명으로도 남았다. 도시철도 1호선 범내골역의 범내를 한자로 쓰면 범천이 된다. 부산진구와 동구가 맞닿은 안창마을 호천(虎川)이 그렇듯 호랑이 들락대던 하천이라 해서 범내, 범천으로 불렸다. 호천이든 범천이든 그쪽 마을에 가면 호랑이 포효하는 벽화 한두 점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범천교는 부산 전체의 허리였다. 부산의 절반은 범천교 이쪽에 있었고 절반은 범천교 저쪽에 있었다. 범천교가 폭삭 내려앉으면 부산의 허리가 내려앉는 거나 다름없었고 범천교가 막히면 부산이 막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신주 모시듯 했고 아무거나 안 넣어주는 ‘동래부지’에서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범천교는 다용도였다. 관리가 드나들었고, 군인이 드나들었고, 장꾼이 드나들었다. 일본인 거류지 초량 왜관에 일이 생기면 동래부 관리가 범천교를 지났으며 부산진과 좌수영 군인이 범천교를 오갔다. 동래장과 부산장, 왜관 장시(場市) 장꾼도 범천교를 뻔질나게 다녔다. 범천교는 행정용 다리, 군사용 다리였으며 상업용 다리였다.
▮호랑이 기운 솟아나는 ‘범천’
범천은 옛날 지도에 간간이 나온다. 낙동강 다리가 아니고 수영강 다리가 아닌데도 옛날 지도가 언급한 데서 범천의 위상이 엿보인다. 하천 명칭에 호랑이 범(凡)을 넣은 게 호랑이가 출몰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호랑이를 통해서 범천의 위상과 기상, 나아가 부산의 위상과 기상을 대내외 천명하려던 것은 아닐까. ‘이 강을 함부로 넘보지 말라.’ 부산의 중심 동래를 넘보던 왜인에게 경고하는 조선의 호랑이 눈매가 범천이 아니었을까.
‘부산고지도’는 1800년대 후반 지도. 동아대 박물관에 있다. 범천이 딱 부러지게 등장한다. 범천 두 글자는 정중동이다. 포효하기 직전의 고요가 감도는 필체다. 영판 호랑이 눈매다. 호시탐탐 두 눈 부릅뜨고 있다가 범천을 무도하게 넘보는 무리에겐 산천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할 기세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志)’도 범천을 표기했다. 1899년 제작하고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이 지도는 부산고지도와 달리 범천교 다리도 또렷하게 그려 넣었다. 길도 또렷하다. 범천교를 지나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리 가면 부산진성이었고 저리 가면 동평 성터를 지나 낙동강으로 이어졌다. 1897년 대한제국 출범 이후 행정 구역을 조선팔도에서 13도로 개편한 내용을 반영한 격변기 지도다.
범천에서 동천으로. 범천의 지금 이름은 동천(東川)이다. 언제 동천으로 바뀌었을까. 앞에 언급한 1800년대 후반과 1899년 지도엔 범천으로 나오니 1900년 들어서 바뀌었다. 그게 언젤까. ‘부산근대지도모음집’은 향토사학자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대표가 2012년 펴낸 자료집. 1894년부터 1960년대 부산 지도를 실었다. 거기 ‘부산지형도’ 부산 북부 지도에 동천이 등장한다.
‘조선지형도(朝鮮地形圖)’는 일제강점기 지도. 1909년부터 1917년 사이에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제작했다. 축척 1:5만으로 제작한 한반도의 남한 36곳 지형도다. 1917년 이후로도 지역별로 계속 발간했다. 부산을 소개한 ‘부산지형도’는 남부와 북부로 나누어 1924년 발행했고 10년 후인 1934년에도 발행했다. 1924년, 1934년 지형도의 북부에 동천이 등장한다. 그런데 명칭이 둘이다. 하류는 풍만천(豊滿川), 중류를 동천이라 했다.
일제강점기 진정서에도 동천이 등장한다. 1936년 조선방직, 대선양조 등 동천 하구의 다섯 기업이 작성해서 부산시장에 해당하는 부산부윤에게 진정한 문서다. 대전 국가기록원에 있는 이 진정서의 제목은 ‘부산진 동천 운하 준설에 관한 진정서’. 동천에 홍수 등으로 떠내려온 토사가 쌓여서 기업 활동에 필요한 물동량 이송이 어려우니 준설해 주십사 하는 진정이었다. 이는 이 무렵도 동천에 배가 다녔으며 공공기관 진정서의 제목으로 등장할 만큼 범천이나 풍만천 대신 동천이 보편화됐다는 방증이다.
▮일제가 스리슬쩍 ‘동천’으로?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제가 조선에서 득세하기 이전엔 범천이던 것이 1900년대 들어,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 스리슬쩍 동천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의 구수하고 토속적인 지명을 무도하게 바꾼 일제였기에 하천인들 무사했을까. 왜를 노려보는 호랑이 눈매 같은 범천 대신 그렇고 그런 지명인 동천으로 전락시켰다고 보는 게 십중팔구, 아니 열에 열 옳다고 본다.
동쪽 하천, 동천. 동천이란 지명 자체도 일제를 의심하는 근거다. 어디를 기준으로 동쪽인가. 부산 전체로 봐선 결코 동쪽이 아닌데도 동천이라 작명한 것은 어딘가 일제 입맛에 맞는 동서남북의 기준점을 두었다는 의미다. 그 기준점이 어딜까. 디지털 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이 명칭 유래를 통해 그것을 밝힌다.
‘동천은 흐르는 방향이 부산진성의 동쪽이라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설명이다. 합당한 설명일까. 글쎄다. 앞뒤가 안 맞다. 일제가 득세하면서 조선팔도 군사조직, 군사시설, 군사지명을 싹둑싹둑 베었는데 작명의 기준점을 왜에겐 눈엣가시였던 조선 군사시설인 부산진성에 둔다? 그것도 폐진 내지는 폐성 이후에? 설명을 위한 설명일 뿐이란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부산진성이 온전하던 조선 시대 그때도 동천이란 지명은 쓰지 않았다. ‘동래부지’도 그렇다고 한다. 범천은 언급해도 동천은 언급하지 않는다. 조선의 군인이 주둔하던 부산진을 폐진한 게 20세기 직전. 동천이란 지명은 20세기 들어서 등장한다. 그러므로 폐진한 부산진성을 동천 작명의 근거로 내세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글쎄다.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동천의 기준점은 어디?
부산진성이 아니라면 어딜까. 줄자를 이리 재어 보고 각도자를 저리 재어 봐도 추정되는 기준점은 오직 하나. 중구 중앙동 돌계단에 있었던 일제강점기 부산부청이다. 부산부청은 지금의 부산시청. “부산부청 동쪽에 있으니 동천으로 하자.” “그래그래, 그러자.” 호랑이는 눈꼴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호랑이 떠난 빈자리에 동천이 “얼씨구나!” 지금껏 주인 행세 하는 건 아닐까. 그런 것도 모르고 지금 우리는 “동천! 동천!” 격양가를 부르는 건 아닐까.
범천과 동천. 멀리 보고 높게 보면 범천이면 뭐 어떻고 동천이면 뭐 어떠랴. 돈도 안 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 살아가는 데 지장을 주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가. 돈이 안 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이라서 나서긴 하지만 멀리, 높게 보지 않는 내가 속 좁은 밴댕이 같아서 개운치는 않다. 부디 부탁인데, 나는 ‘바담풍’ 해도 듣는 분은 ‘바람풍’으로 알아주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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