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찰스3세 대관식 모델은 솔로몬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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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대관식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국은 기독교가 쇠퇴한 정도를 넘어 거의 반(反)기독교 문화가 압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관식에서는 민수기, 시편, 잠언, 누가복음,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등 성경 말씀이 계속 나오고 기도와 아멘이 이어지더군요. 왕정 폐지론이 끊이지 않는 영국에서 역설적으로 전세계에 기독교 문화를 중계한 것 같아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난 6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찰스 3세 대관식 중계를 시청한 원우현 장로님(고려대 명예교수)은 얼마 전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 장로님은 “그런 점이 신선해 1시간 넘는 대관식 중계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원 장로님 말씀처럼 이번 찰스 3세 대관식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구약과 신약 성경 말씀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약시대 사울-다윗-솔로몬 시절의 대관식처럼 ‘기름 부음(성유 의식)’까지 실제로 행해진 예식이었습니다. 대관식은 특히 영국 성공회 예식으로 치러졌기에 개신교 예배보다는 천주교의 미사에 가깝게 절차 하나하나가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져 거의 2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대관식 순서가 보도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기름 부음(성유 의식)’을 보고 싶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사무엘 선지자 때 처음 왕정(王政)이 시작되지요.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워줍니다. 대관식 장면에 대한 묘사는 구약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등에 나오지요.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우고, 나팔을 불어 새 왕이 등극했음을 알리면 백성들은 만세를 부르지요. 새 왕은 칼은 차고 왕좌에 앉아 율법책(성경)과 홀(笏)을 들지요.
그 중 성경은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도 등장하고, 나팔(팡파르)이나 칼 등은 왕의 대관식이라면 충분히 등장할 법한 물건이지만 성유 의식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이어오는 특별한 상징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성유 의식을 보고 싶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메시아’가 바로 히브리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고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그리스도)’지요. 구약에서 기름 부음을 받는 이는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대관식에서는 왕의 머리에 실제로 기름을 부었다는 것이지요. 열왕기엔 솔로몬 왕의 대관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지난 6일 열렸던 찰스 3세의 대관식도 가장 중요한 뼈대만 추리면 ‘기름을 붓고 나팔을 불고 만세를 외쳤다’가 되겠지요. 바로 그 ‘기름 붓는’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을까 했던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대관식 이전부터 ‘성유 의식’은 비공개로 진행할 것으로 예고됐습니다. 70년 전인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때도 비공개였다고 합니다. 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떻게 비공개로 성유 의식을 할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간단하더군요. 위병들이 가림판 3장을 들고 나와 3면을 가려 청중과 TV카메라에 안 보이도록 하더군요. 가림판 안에서 켄터베리 대주교가 찰스 3세의 머리와 가슴, 손에 성유를 발라준 후에야 가림판은 철거됐습니다. 가림판 안으로 들어서기 전 찰스 3세는 망토와 화려한 예복을 벗고 가벼운 흰색 셔츠 차림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비밀스럽고 내밀하게 기름 부음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성유 의식은 약 3분여 진행되더군요. 이날 2시간에 걸친 예식 중에 찰스 3세의 모습이 대중의 시선에서 가려진 것은 이때뿐이었습니다.
영국 버밍엄대에서 신학박사를 받고 성공회대 총장을 지낸 대한성공회 양권석 신부님께 대관식과 기름 부음에 대해 여쭸습니다. 양 신부님은 ‘기름 부음’에 대해 “종교개혁 이후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난 유럽 각국은 ‘우리가 이스라엘이 되겠다’는 의식이 강했다”며 “대관식에서 성유 의식을 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성별(聖別·거룩하게 분별함)을 통해 이스라엘 왕을 세우듯이 새로운 왕을 세운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자기 나라가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되겠다는 의미로 국민 결속과 통합의 모티브로 ‘기름 부음’ 의식을 행했다는 것이지요. 양 신부님은 또 ‘기름 부음’에 대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기름은 치료제, 정화제로 쓰였기 때문에 불결한 것을 없애고 성화(聖化)시킨다는 의미”라며 “기름 부음 전통은 현재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에서 사제·주교 서품식과 견진성사 때에 행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름 부음’ 외에 대관식에서 눈에 띈 점은 성공회만의 예식이 아니라 다양한 기독교 교파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였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장이 예식 초반에 성경을 왕에게 보여주며 “이 세상이 주는 것들 중 여기 신성한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왕의 법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생생한 오라클(신탁)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찰스 3세는 선서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면서도 “모든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서는 없었던 구절이라고 합니다. 양 신부님은 “찰스 3세는 어머니 생전에서부터 이처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의견을 피력해왔으며, 이번 대관식에서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예식 중간 부분엔 수낵 영국 총리가 골로새서를 봉독했습니다. 인도계인 수낵 총리는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성경이 아닌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 손을 얹고 선서한 힌두교도라고 합니다. 그밖에도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검을 든 여인 등 대관식에서 여성이 주요 역할을 맡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요. 전체적으로 대관식을 종교와 사회 통합의 장으로 삼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한 찰스 3세가 소년의 환영 인사에 대해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겠다”고 한 대답은 마태복음 20장 28절의 예수님 말씀이지요. 이처럼 전체적으로 대관식의 키워드는 ‘섬김’과 ‘겸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요. 이런 노력 덕분인지 이번 대관식에 대해 격렬한 반대는 덜했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종교에 무관심했던 영국인들조차 70년만에 이뤄진 이번 대관식을 통해 성공회 신앙, 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양권석 신부님은 “영국인들은 성당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금새 모이곤 하는 등 성공회를 생활의 일부로 여기지만 미사에 참석하는 인원은 소수”라며 “대관식 이후 영국 언론에 ‘대관식을 집전한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누구인가’ 등의 기사가 실리는 것을 보면 관심이 생긴 것 같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 관심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종교 의식(ritual)은 힘이 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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