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외롭지 않게…부산도 5·18 참상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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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4일 23세의 청년이 '광주 애국시민 학생들을 학살한 자들을 처단하자' '전두환을 타도하자'는 유인물 한 뭉치를 손에 들고 부산 서면 거리로 나섰다.
송 씨는 부림사건 피해자로 알려져 있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부산시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 것도 16일 국제신문 취재로 밝혀졌다.
김재규(76)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중심으로 뭉친 청년들은 5·18이 일어난 지 6일 만에 광주 상황을 담은 유인물을 서면 일대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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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남포동서 유인물 배포…“할 수 있는 행동 했다” 회고
1980년 5월 24일 23세의 청년이 ‘광주 애국시민 학생들을 학살한 자들을 처단하자’ ‘전두환을 타도하자’는 유인물 한 뭉치를 손에 들고 부산 서면 거리로 나섰다. 그는 영화 ‘변호인’의 돼지국밥집 아들로 알려진 송병곤(66·사진) 씨였다. 송 씨는 부림사건 피해자로 알려져 있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부산시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 것도 16일 국제신문 취재로 밝혀졌다.
김재규(76)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중심으로 뭉친 청년들은 5·18이 일어난 지 6일 만에 광주 상황을 담은 유인물을 서면 일대에 뿌렸다. 송 씨는 취재진을 만나 43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광주를 향해 “부채의식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부산에서 커다란 시위를 펼치는 게 맞지만 그럴 순 없었기에 유인물이라도 뿌렸다. 할 수 있는 행동이라도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다만 5·18광주를 향해 “당신들은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5·18 광주가 폭력을 당할 때 연대한 이들이 더 있었다는 뜻이다.
송 씨가 유인물을 뿌리기 앞서 5월 19일 부산대 지하서클 ‘사랑공화국’ 회원들이 남포동 일대에서 신군부 쿠데타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송 씨 역시 사랑공화국 소속이었다. 그는 남포동 유인물 살포에 참여했다 체포된 동료들을 챙겨주는 역할도 맡았다.
그러다 계엄합동수사단의 포위망이 좁혀왔다. 송 씨는 “집 가다 모르는 할머니가 붙잡았다. 할머니가 ‘니가 병곤이가? 너희 엄마가 얘기하는데 집으로 오지 말라더라’고 하자 아차 싶었다”면서 “수사관을 피해 다른 곳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도망친 그는 김 전 이사장을 만나 광주 상황을 보도한 당시 외신 기사를 보았고 15~20일 광주에 머문 이병철(75)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에게서 진상을 들었다.
송 씨는 이어 같은 달 24일 오후 8시께 서면 천우장에서 유인물을 뿌렸다. 그는 “건물 4층쯤에서 창문을 열었다. 겁이 났는지 종이를 뿌리지 않고 묶음으로 확 내던졌다. 유인물이 확 펴지지 않아 아쉬웠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송 씨는 “광주는 끝까지 저항했다”면서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신문은 부산에서 김 전 이사장 중심의 청년 모임 외에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알리려 했던 다수의 청년이 더 있었음을 확인했다. 5·18 43주년을 맞아 송 씨 외에도 총 6명의 관련자를 인터뷰해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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