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는데 뭐든 하자” 전단 뿌리니 서면에 계엄군 쫙 깔려

박주현 기자 2023. 5. 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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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5·18 알린 사람들

- 영남상고 교사였던 신종권 씨
- ‘광주소요는 항쟁’ 직감 후 결행
- 징역 살고 97년에야 무죄판결

- “태화극장 앞 모여 총궐기하자”
- 김재규 씨 등 유인물 제작·살포
- 다음 날 탱크·군인 거리 점령

- 이병철 당시 가톨릭농민회 국장
- 광주참상 목격 후 부산에 알려

“뭐라도 하자, 이런 마음으로 했죠. 대단한 결의가 있는 건 아니고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뭐라도 알려야 안 되겠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신종권 씨가 1980년 계엄법 위반으로 실형을 받은 피해자들의 재심 관련 국제신문 기사를 보고 있다. 박주현 기자


1980년 5월 24일 부산 서면 천우장에서 5·18 광주 상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린 박모(71) 씨는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그는 “무용담으로 알려지기 싫다”며 익명을 요구했다. 43년 전 부산에는 광주 참상을 알게 되자 이를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거나 시위를 계획한 청년들이 있었다.

▮“소요라고 보도되자 항쟁 직감”

김재규 씨(왼쪽), 이병철 씨


영남상고(현 부산정보고) 교사였던 신종권(70) 씨는 같은 해 5월 21일 “광주만 당하게 해선 안 된다”며 동아대 후배들을 자택에 불러모았다. 부산에서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광주 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비판’과 같은 내용의 유인물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 씨는 “부마민주항쟁 때 집회의 시발점이었던 남포동 부영극장에서 시위를 갖고 유인물을 뿌릴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역사 교사였던 신 씨는 계엄사의 언론 검열로 5·18이 광주 소요사태로 보도되자 항쟁이라고 직감했다. 신 씨는 재학 시절 ‘동아독서회’ 서클을 이끌었던 학생운동 1세대다. 그러다 5·18을 보도한 일본방송을 보면서 이를 확신했다. 당시는 부산에서도 일본방송이 수신됐다.

동아대 모임자 중 한 명인 성병덕(69) 씨는 유인물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 씨는 “서두만 작성한 상태였다. 광주 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비판을 담은 내용이었다”며 “작성을 마친 후에 신 선배가 등사할 예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24일 시위 계획이 계엄합동수사단에 새나갔다. 결국 교사 신분이었던 신 씨가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했다. 신 씨는 이 일 때문에 계엄법 위반 혐의로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받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다. 그 후 1997년 재심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성 씨는 “당시 뜻 있는 사람들은 신군부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서도 “중도에 그쳐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쑥스럽다”고 말했다. 신 씨와 성 씨는 당시 광주 상황을 알린 김재규(76)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모임과는 다른 동아대 모임이었다.

▮“유인물에 계엄군 발칵 뒤집어져”

박모 씨가 1980년 5월 24일 유인물을 뿌린 천우장 건물을 가리키는 모습. 박주현 기자


1980년 5월 24일 서면중앙대로엔 ‘전두환을 타도하자’ ‘광주 전주 애국시민 학생들을 학살한 자들을 처단하자’ 등과 다음 날 서면 태화극장(현 쥬디스태화) 앞에서 모여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이 흩날렸다. 김 전 이사장을 필두로 한 청년들이 서면 등지에 이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다. 이들은 2인 1조로 젊은 연인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위장해 동시다발적으로 버스 천우장 태화극장 등에서 살포했다.

익명을 요구한 문모(71) 씨는 버스가 멈춰 섰을 때 환기통에 유인물을 얹어놓고 달아났다. 버스가 출발하면 유인물이 흩날리는 것이다. 누가 유인물을 뿌렸는지 파악하지 못해 경찰과 계엄군이 발칵 뒤집어졌다. 박모 씨는 “다음 날 서면을 가보니 도로에 탱크가 있었고 계엄군은 착검을 했다”고 회상했다.

김 전 이사장 모임에 광주 참상을 알린 이병철(75) 당시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은 “행사 준비 차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사무실에 있다가 5월 18일 시위에 나선 학생을 향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장면을 목격했다”며 “‘이래선 안 된다. 이걸 전부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김 전 이사장을 만났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김재규 모임에 상황을 알려주고 어떻게 알릴지, 유인물을 어떻게 담을지 상의하고 다음 날 서울로 갔다”고 밝혔다.

1980년 당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2군 상황 일지’에 김 전 이사장 모임이 살포한 유인물을 수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일지 속 24일 ‘중사 계급의 흰 명찰을 한 성명불상 군인 1명이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 유인물 속에는 ‘민족 반역자 전두환 물러가라’와 김 이사장 그룹이 알렸던 다음 날 시위 내용도 적혀 있다고 기록됐다. 김 전 이사장 모임과 활동은 당시 적발되지 않았으나 1981년 부림사건 때 대부분 드러나 고초를 겪었다.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은 “당시 광주의 희생이 압도적이라서 상대적으로 부산 운동이 조명받지 못했다”면서 “이러한 저항이 있어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더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조명을 하는 것이 그때 투쟁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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