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는데 뭐든 하자” 전단 뿌리니 서면에 계엄군 쫙 깔려
- 영남상고 교사였던 신종권 씨
- ‘광주소요는 항쟁’ 직감 후 결행
- 징역 살고 97년에야 무죄판결
- “태화극장 앞 모여 총궐기하자”
- 김재규 씨 등 유인물 제작·살포
- 다음 날 탱크·군인 거리 점령
- 이병철 당시 가톨릭농민회 국장
- 광주참상 목격 후 부산에 알려
“뭐라도 하자, 이런 마음으로 했죠. 대단한 결의가 있는 건 아니고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는데 뭐라도 알려야 안 되겠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1980년 5월 24일 부산 서면 천우장에서 5·18 광주 상황을 담은 유인물을 뿌린 박모(71) 씨는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그는 “무용담으로 알려지기 싫다”며 익명을 요구했다. 43년 전 부산에는 광주 참상을 알게 되자 이를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거나 시위를 계획한 청년들이 있었다.
▮“소요라고 보도되자 항쟁 직감”
영남상고(현 부산정보고) 교사였던 신종권(70) 씨는 같은 해 5월 21일 “광주만 당하게 해선 안 된다”며 동아대 후배들을 자택에 불러모았다. 부산에서도 비상계엄 해제와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광주 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비판’과 같은 내용의 유인물도 만들기로 결의했다. 신 씨는 “부마민주항쟁 때 집회의 시발점이었던 남포동 부영극장에서 시위를 갖고 유인물을 뿌릴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역사 교사였던 신 씨는 계엄사의 언론 검열로 5·18이 광주 소요사태로 보도되자 항쟁이라고 직감했다. 신 씨는 재학 시절 ‘동아독서회’ 서클을 이끌었던 학생운동 1세대다. 그러다 5·18을 보도한 일본방송을 보면서 이를 확신했다. 당시는 부산에서도 일본방송이 수신됐다.
동아대 모임자 중 한 명인 성병덕(69) 씨는 유인물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성 씨는 “서두만 작성한 상태였다. 광주 학살을 일으킨 전두환 비판을 담은 내용이었다”며 “작성을 마친 후에 신 선배가 등사할 예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24일 시위 계획이 계엄합동수사단에 새나갔다. 결국 교사 신분이었던 신 씨가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했다. 신 씨는 이 일 때문에 계엄법 위반 혐의로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받고,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다. 그 후 1997년 재심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성 씨는 “당시 뜻 있는 사람들은 신군부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서도 “중도에 그쳐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쑥스럽다”고 말했다. 신 씨와 성 씨는 당시 광주 상황을 알린 김재규(76)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모임과는 다른 동아대 모임이었다.
▮“유인물에 계엄군 발칵 뒤집어져”
1980년 5월 24일 서면중앙대로엔 ‘전두환을 타도하자’ ‘광주 전주 애국시민 학생들을 학살한 자들을 처단하자’ 등과 다음 날 서면 태화극장(현 쥬디스태화) 앞에서 모여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이 흩날렸다. 김 전 이사장을 필두로 한 청년들이 서면 등지에 이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다. 이들은 2인 1조로 젊은 연인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위장해 동시다발적으로 버스 천우장 태화극장 등에서 살포했다.
익명을 요구한 문모(71) 씨는 버스가 멈춰 섰을 때 환기통에 유인물을 얹어놓고 달아났다. 버스가 출발하면 유인물이 흩날리는 것이다. 누가 유인물을 뿌렸는지 파악하지 못해 경찰과 계엄군이 발칵 뒤집어졌다. 박모 씨는 “다음 날 서면을 가보니 도로에 탱크가 있었고 계엄군은 착검을 했다”고 회상했다.
김 전 이사장 모임에 광주 참상을 알린 이병철(75) 당시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은 “행사 준비 차 광주 금남로 가톨릭센터 사무실에 있다가 5월 18일 시위에 나선 학생을 향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장면을 목격했다”며 “‘이래선 안 된다. 이걸 전부 알려야 한다’는 마음에 김 전 이사장을 만났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김재규 모임에 상황을 알려주고 어떻게 알릴지, 유인물을 어떻게 담을지 상의하고 다음 날 서울로 갔다”고 밝혔다.
1980년 당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2군 상황 일지’에 김 전 이사장 모임이 살포한 유인물을 수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일지 속 24일 ‘중사 계급의 흰 명찰을 한 성명불상 군인 1명이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유인물을 살포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 유인물 속에는 ‘민족 반역자 전두환 물러가라’와 김 이사장 그룹이 알렸던 다음 날 시위 내용도 적혀 있다고 기록됐다. 김 전 이사장 모임과 활동은 당시 적발되지 않았으나 1981년 부림사건 때 대부분 드러나 고초를 겪었다.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은 “당시 광주의 희생이 압도적이라서 상대적으로 부산 운동이 조명받지 못했다”면서 “이러한 저항이 있어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더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조명을 하는 것이 그때 투쟁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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