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한계 넘어서는 발레의 기쁨 …나만의 춤 만들 경험이 중요”[논설위원의 단도직입]
196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고교 3학년이던 1986년 유니버설발레단 <지젤>의 엑스트라로 출연했다가 발레를 배워보라는 권유에 연수생으로 입단하고, 이듬해 오디션에 합격해 정단원이 됐다. 1998년 부상으로 인해 발레단을 그만둘 때까지 공연무대에 560회 섰다. 이후에도 발레 <심청>의 심봉사 역을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 연기로 참여해왔다. 2002년 국내 최초의 취미 발레 학원인 ‘발레조아’를 서울 신촌에 열었다. 최근 성인 취미 발레생들로 구성된 ‘김현우발레단’ 21주년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성인발레 신체 퇴화기 때 시작…몸의 무한한 가능성에 놀랄 때가 많아
근육의 기억은 48시간…반복 통해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에 새겨져야
남과 비교하면 위축…틀려도 좋으니 시행착오 겪으며 하나씩 털고 가야
최근 발레단 21돌 공연, 단원들의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에 감탄
고3 때 발레 시작…고생과 실패 경험이 되레 늦깎이 학생 이해의 토양
성공 못할 줄 알면서도 하는 도전이 있다. 과정에서 얻는 기쁨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성인 발레가 그렇다. 몇년을 연습해도 풀업, 턴아웃, 포엥 같은 기초동작조차 제대로 해내기 쉽지 않은데 취미발레 인구가 크게 늘고 있다. 최대 발레 커뮤니티 ‘레오타드를 입는 사람들’ 회원은 1만5000명에 달한다. 유니버설발레단 출신으로, 2000년대 국내 성인발레를 개척하고 ‘김현우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김현우 단장을 지난 9일 서울 신촌 발레조아학원에서 만났다. 김 단장은 “내 몸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가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면서 “자기만의 춤을 만드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대표적 엘리트 예술인 발레를 취미 삼아 배우는 성인들이 많아졌습니다.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발레 훈련을 하면서 성장기를 거칩니다. 반면 취미로서의 성인발레는 성장기를 지나 신체의 퇴화가 진행될 때 시작됩니다. 경이로운 점은 인간의 몸이 새로운 배움을 접할 때에는 새로운 도약을 한다는 것입니다. 근육이 찢어질 듯한 스트레칭과 고된 훈련을 통해 몸 쓰는 방법을 익히면 마치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한 단계 올라섭니다. 몸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가르치면서도 놀랄 때가 많습니다.”
- 국내 취미발레의 ‘시조’로 꼽힙니다. 계기가 있습니까.
“1998년 유니버설발레단을 떠나 뮤지컬 <드라큘라>의 한국 초연 무대에 배우로 참여할 때였습니다. 안무에 발레 테크닉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출연자들에게 발레 수업을 하면서 일반인도 충분히 발레를 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이후 재즈댄스 커뮤니티에서 발레를 가르치다가 2002년 서울 신촌에 국내 첫 취미발레 학원을 냈습니다. 춤은 무용수와 관객, 그 둘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헤아려 보니 지금껏 가르친 학생이 5000명이 넘습니다. 국악 전공 학생이 발레를 취미로 배우다 푹 빠져서 발레로 대학 재입시를 쳤는데, 그 학생이 무용학 박사가 돼서 대학 강단에 설 정도로 시간이 흘렀네요.”
- 유니버설발레단에서 활동했죠.
“1987년 정단원으로 입단해서 부상으로 은퇴하기까지 11년간 560회 무대에 섰습니다. 이후에도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 <로미오와 줄리엣>의 캐릭터 아티스트로 무대 출연을 계속해왔습니다. 유니버설발레단을 대표하는 창작발레 <심청>의 ‘심봉사’ 역은 2000년 이후 단골로 맡아왔는데, 최근 공연에는 무릎 연골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 발레를 언제 시작했습니까.
“1986년 고교 3학년 때입니다. 연극영화과 지망생이던 저는 아르바이트 삼아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공연의 귀족 엑스트라 등으로 출연했어요. 어느 날 발레단 형님이 포엥(발끝을 뾰족하게 만드는 발레의 기본동작) 등을 시켜보더니 ‘발레 배워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시더군요.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라 동경조차 하지 않았던 발레리노가 될 수 있다니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얼얼했어요. 당시 유니버설 단장님이 ‘남자는 늦게 발레를 시작해도 무리가 없으니 신체조건이 양호한 친구가 있으면 섭외해보라’고 한 찰나에 운 좋게 제가 눈에 띄었던 거죠.”
키 180㎝의 청년은 그해 10월부터 연수생 자격으로 하루 12시간씩 발레단에서 맹연습을 거쳐 이듬해 4월 오디션에 합격해 정단원 발레리노가 됐다.
- ‘내 인생의 스승’은 누구인가요.
“유니버설발레단의 3대 예술감독 겸 안무가를 지내신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1927~2006)입니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안무가인 조지 발란신의 제자이자 ‘한국 발레계의 스승’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제 연기 재능을 알아보시고는 발레 작품의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캐릭터 배역을 많이 시키셨어요. 어릴 땐 춤을 더 많이 추고 싶어서 갑갑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선생님 덕에 더 오래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문훈숙 유니버설 단장이 현역 발레리나 시절일 때 저는 그의 아버지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문 단장이 요즘도 저를 ‘아버님’이라고 농담처럼 부릅니다.”
- 후회되는 일도 있습니까.
“토비아스 선생님이 여러번 기회를 주셨는데 부응하지 못해 지금껏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한 번은 작품의 언더스터디(주인공이 사고 날 때를 대비한 대역)를 제게 맡기셨는데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게을렀어요.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그저 어깨를 두드려주셨죠.”
발레가 당연한 듯 그에게 왔으므로, 김 단장은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1997년 공연 도중 발목 인대가 절반 넘게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 서른 살이던 이듬해 미국 투어를 마지막으로 발레단을 그만뒀다. “나는 그저 세상의 일부였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부상에서 완전히 낫기까지 3년이 걸렸다. 늦은 나이에 발레를 배운 고생과 한 번 꺾여 잃어본 실패는 오히려 늦깎이 학생들을 이해하는 토양이 됐다.
- 내 몸뚱이인데 내 뜻대로 안 되는 경험들을 많이 합니다.
“근육의 기억시한은 48시간입니다. 이후에는 몸이 감을 잃죠. 이틀 안에는 연습해야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예체능에서 요구되는 동작이 몸에 새겨지기까지는 무수히 많은 시간에 걸친 반복이 필요합니다. 무대에 나갈 차례인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고 동작 안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머리는 기억을 못해도 몸이 기억을 하니까 괜찮다고 학생들에게 말해줍니다.”
- 열심히 하려다가 긴장하고 몸에서 힘을 못 빼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년을 배우고도 두 바퀴 회전을 못하는 학생이 있었어요. 그런데 턴은 힘으로 도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 긴장하면 몸이 굳는데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힘만으로 되는 일은 없잖아요. 욕심을 내려놓고 적절하게 힘을 풀었을 때 오히려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깨끗한 도화지같이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말해요. 힘을 빼고 더블턴 성공한 날 그 학생이 홀 구석에서 우시더라고요.”
- 한국인들은 취미활동에서조차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해요.
“경쟁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만 느끼는 거예요. 남과 비교하고 자격지심을 갖게 되면 마음이 위축되고 몸도 쭈그러듭니다. 틀려도 괜찮아요. 전공생이거나 프로처럼 무대에서 평가받는 게 아니잖아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하나씩 털어내며 가면 됩니다. 잘 못하더라도 자기만의 춤을 만들어가는 경험치를 쌓는 게 중요해요. 실패했다는 것은 내가 도전했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서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습니다.”
- 발레를 처음 배우는 50~60대 학생들도 요즘은 드물지 않습니다.
“젊고 에너지가 최고조일 때는 많이 뛰고 많이 돌아야 좋은 춤인 줄 알았어요. 오랜 경험을 해보니 그게 능사는 아니더군요. 정적인 동작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예로, <빈사의 백조>는 3분 동안 섬세한 팔동작과 표정만으로 죽어가는 백조를 표현해냅니다. 각자의 나이에는 그에 맞는 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발레리노로서 몸의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나이가 드니 몸이 중력에 충실해지면서 의지와 달리 점프도 줄고 나잇살도 안 빠집니다. 발레리노는 ‘점프’와 ‘턴’이 승부수인데, 40대 중반이 넘어서면 힘이 줄어들면서 높이도 바퀴 수도 예전보다 줄어듭니다. 박수 칠 때 무대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는 거죠. 마음 같아서는 남자 수강생들에게 공중 테크닉을 보여주고 싶은데 부상 위험도 커집니다. 말로만 설명이 가능한 전공생 수업에 비해서 취미발레 학생 수업이 더 어렵습니다.”
- 학원을 그만둘 뻔한 적은 없습니까.
“2010년쯤 성인 발레학원이 늘고, 함께 일하던 후배 강사가 학원을 차려 독립하면서 수강생이 급감했습니다. 임차료가 밀려서 2개 층 규모 학원을 1개 층으로 줄였어요. 힘들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내가 더 훌륭하면 수강생들이 나한테 왔겠지만, 다른 선생님이 훌륭하니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욕심내지 않고 학생이 한 명이더라도 열 명, 스무 명이 있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수업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다시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 지난달 ‘김현우발레단’ 21주년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19명의 취미발레생이 30분 길이의 조지 발란신 안무 <세레나데>를 3개월간 토·일요일 주말 연습만으로 무대에 올리다니 놀라웠어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현역 시절 출연했던 음악과 동선이 아름다운 작품이라 호기심에 시작했는데, 한 달쯤 지나자 후회가 밀려왔어요. 출연 인원 수를 채우고 시간 맞추는 것부터 난관이었습니다. 연습하고 다시 만나면 안무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다른 작품으로 바꿔야 시간에 안 쫓길 것 같았는데,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왔더군요. 연습영상을 공유하면서 시선과 손 위치를 체크하고, 공연 직전 쉽게 바꿔도 되니까 어려운 동작도 포기하지 말자고 설득했어요.”
- 단장님은 좀처럼 화내지 않으신다고들었습니다.
“발레단 현역 시절 파드되(남녀 2인무)를 할 때 누나들이 동작이 잘 안 되면 제 탓을 하면서 화를 내곤 했습니다. 파드되는 여성이 기본적으로 자기 몸을 컨트롤하고 남성이 보조하는 것이거든요. 그때는 제가 마음이 여려서 위축이 많이 됐어요. 그러면 제대로 역량을 펼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수업 때 수강생들이 긴장하지 않게 노력하는 편입니다. 발레 실력이 늘고 성장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발레로 즐거우면 그만이거든요. 권위적인 강사에게 ‘못한다’고 비난받고 상처받아서 발레를 그만뒀다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저는 잘못하는 거라고 봐요. 한국 옛 교육방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김현우 단장의 향후 계획을 물었다. 바로, 성인 취미발레 학원들의 합동 공연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도 “성실한 직장인이 무대에서 드디어 자기 내면의 알을 깨뜨리고 나오는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해서 기뻤다”면서 “프로가 아니어도, 프로 같은 몸이 아니어도, 환갑의 나이에도, 뒤늦게 시작했기에 오히려 더 마음은 간절하고 열정은 뜨겁다”고 말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 자신만의 움직임을 찾아 나가는 예술이 자라고 있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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