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위(海蔘威)와 中·러의 밀착[만물상]

이하원 논설위원 2023. 5. 16.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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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1856년 러시아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크림전쟁에서 패해 파리강화회의에서 영토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지중해로 나가는 흑해의 군항을 상실했다. 영국과 세계 패권을 놓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러시아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부동항이 절실한 러시아가 눈을 돌린 곳이 유라시아 대륙 맨 끝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 와중에 중국을 협박했다. 1858년 헤이룽장성 북쪽 아무르강의 아이훈(璦琿)에서 불평등 조약을 맺고 연해주 지역을 모두 품었다. ‘동쪽을 정복한다’는 의미의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가 러시아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한국·중국·일본을 지척에 둔 블라디보스토크를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버금가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극동 해군기지와 자유무역항을 동시에 만드는 계획을 착착 실현시켰다. 뿔 모양으로 파고드는 만(灣)을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금각만(Golden Horn)’과 똑같이 이름 지으며 흑해를 갖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엔 당시 황태자이던 니콜라이 2세가 참석했다. 상인이던 배우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가 이곳을 동북아 주요 항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은 이곳을 중심으로 태평양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APEC 정상회의도 여기서 개최했다. 2015년부터는 매년 한·중·일과 몽골 등을 초청, 동방경제포럼을 열고 있다. 2018년엔 러시아 극동 관구의 행정수도를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했다.

▶연해주 전체는 고구려 영토였다가 698년 건국한 발해 땅이 됐다. 우리 선조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렀다. 1860년대부터 한인들이 이주해 신한촌(新韓村)이 만들어졌다. 인근 도로는 한인 거리를 뜻하는 ‘카레이스키 스카야’로 명명됐다. 1900년 블라디보스토크 동방대학은 세계 최초로 한국문학과를 개설했다. 이동휘, 신채호 등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斷指) 동맹’을 결성한 곳도 여기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중국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을 줬다. 이번 조치로 옛 영토를 통해 동해로 진출한다는 중국의 소망이 이뤄졌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다 러시아가 국력을 소진하고 연해주에서 중국에 사실상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한다. 앞으로 중국 함대가 이 항구를 기지로 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등장한 중국이 우리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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