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문명으로의 전환시대 詩 쓰기는 공동체 존재들과의 우정”
지난 20년간의 비평·연구·산문 등 모아
생태위기의 현실 속 시의 역할 되짚어
백무산·김혜순·허수경의 시를 통해서
노동·자본에 대한 근본적 사유 풀어내
백석 등 문학적 스승·동료 작가론 엮어
스스로 평론가보다는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더 생각해 온 데다가 개별 평론도 아닌 특집 기획에 들어간다는 말에, 그는 적잖이 부담이 됐다. 더구나 젊을 때부터 비평을 가급적 쓰지 않으려 피했던 그가 아니던가. 왜냐하면 현장비평을 시작하면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고, ‘비평의 칼’이 결국 자신을 겨눌 수밖에 없다는 인과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서 그 시인이 시를 쓸 때의 내면 상태, 그 시가 시작될 때의 느낌을 주로 생각합니다. 마치 시인 옆에서 관찰하듯이, 그 과정에 참여한다는 느낌으로, 최종적인 텍스트보다는 시인의 시적 과정을 바라보죠. 비평가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에서 조금 차이가 날 것 같아요.”
중견 시인이자 평론가, 에세이스트 나희덕이 지난 20년간의 비평과 연구, 산문을 모은 시론집 ‘문명의 바깥으로’(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후 20년 만이다.
시론집은 크게 근대문명의 위기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속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쓴 주제론인 제1부와, 문학적 스승과 동료가 돼 준 시인들에 대한 시인론의 2부와, 백석과 김수영, 김종삼 등 자신의 시 스승들에 대한 시인론인 3부로 이뤄졌다.
“처음 시를 공부하고 쓸 때는 시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시의 소재와 주제, 방법에 대한 어떤 미학적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오히려 시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시를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졌어요.”
시론집을 여는 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는 근대문명의 위기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시대를 사는 시인들이 어떤 의식을 토대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지를 백무산과 김혜순, 허수경의 시를 통해서 살펴본다.
―왜 백무산과 김혜순, 허수경의 시를 통해서 근대문명의 위기나 생태문명으로 전환 징후를 읽어내려 한 것인가요.
“노동시인으로 널리 알려 있는 백무산은 리얼리즘 계통에서 노동뿐 아니라 자본 문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사유를 해온 시인입니다. 반면, 김혜순은 모더니즘 계열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들의 고통을 직접 몸으로 담아내는 시 쓰기를 치열하게 해오신 분이고요. 얼핏 보면 문학적으로 달라 보이지만, 문명적 상황에서 고통 받고 디스토피아를 살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동물의 관계론적 사유와 시적 감수성’은 201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에 나타나는 동물 담론의 경향이나 특징 등을 들여다보는 글. 이장욱, 강성은, 이근화 시인 등 젊은 작가들의 동물시들을 주로 다룬다.
―‘식물성의 시인’으로 불릴 정도로 식물적 사유를 많이 해왔는데, 동물권이나 동물시들을 살펴본 글이라서 눈에 띄는데요.
“문예지들을 꾸준히 읽어온 편인데, 2010년대 이후 시에서 동물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변화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이전의 동물시들에서 동물은 단순히 소재로 차용되거나 아니면 시적 화자를 대변하는 비유나 상징으로 나타났다면, 최근에는 독립된 행위 주체로서 동물을 인식하고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인간과 동물 간의 새로운 관계론을 모색하고 있죠. 자크 데리다나 조르조 아감벤의 동물 논의를 읽으면서, 동물에 관한 한국 시인들의 새로운 감수성을 정리해 본 거죠.”
마지막 ‘현대시와 공동체’는 1930년대 백석과 1970년대 신경림을 거쳐서 2000년대 현대시에 나타난 공동체적 경향을 살펴본 글이다.
―최근 공동체적 경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990년대 개인화된 세계로 흩어졌던 시인들이 각자의 밀실에서 글을 쓰다가 다시 공동체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용산참사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재난 현장에 시인들이 모여서 낭독회를 하고, 함께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카페를 만들어 토론을 했어요. 희생자들의 삶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목소리를 내면서 문학적 공동체가 만들어진 거지요. 한국시에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필요성이 대두된 시기를 생각해 보면 대체로 공동체적 가치나 기반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흔들릴 때 나타났던 것 같아요. 일제강점기 때 농촌 공동체가 붕괴되고 유민현상이 나타나는 등 민족공동체 자체의 존립이 부정되던 1930∼40년대에 백석이나 이용악 등이 문학작품을 통해서 공동체적 복원을 시도했어요. 다시 공동체적 요구가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산업화로 인해 농촌 공동체가 파괴되고 도시화로 인한 소외가 발생하면서였어요. 다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오면서는 생명 공동체, 비인간까지를 포함한 ‘퇴비 공동체’ 논의까지 확대되었고요.”
1966년 논산에서 태어난 나희덕은 시 ‘뿌리에게’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을 펴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날 인터뷰는 마치 수업을 하듯이 정돈되고 가지런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시는 뭘까, 시 쓰는 일은 뭘까. 그는 이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20년 사이 변화를 설명할 때도, 공동체 이야기를 할 때도. 우리 시대 시와 글쓰기, 문학하기의 의미와 역할을.
“…실제로 공동체에 들어가서 살거나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삶 대신, 이제는 제가 쓰는 시가 하나의 언어적 공동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시를 쓰는 동시대 시인들과 대화하면서 어떤 공동체적 지향을 주고받고 같이 나아가는 문학적 공동체 내지 문학적 우정들을 생각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노래가 되어갔고, 기자는 그 노래에 천천히 취해갔다. 주변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블랙홀처럼 점점 빠르고 강렬하게.
…문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독백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서 건네는 언어잖아요. 유리병 편지에 비유하기도 했고요. 결국 문학한다는 것은 공동체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존재를 위해서 선물처럼 시를 쓰는 것?존재들과의 우정….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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