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 마을 두 집 중 한 집 폐병 “동네 이러니 병 낫겠나”
# 수정동 ‘79번지 마을’ 피해인증 54명
- 100세대도 안 되는데… 무더기 질환자
- 지자체 지붕 무료 교체사업 홍보 부족
- 대상자 주민, 돈 드는 줄 알고 안 고쳐
# 문현동 ‘돌산마을’ 피해인증자 30명
- 무허가 건물 강제철거 도중 과다 노출
- 마지막 주민 “폐에 박힌 석면조각 남아
- 돈 없어 이사 못 간 결과가 폐병이라니…”
▮ 노후 슬레이트 지붕, 지금도 먼지 풀풀
16일 부산 동구 수남경로당 앞 공원. 정자에 앉아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주민 옆에 부서진 채 방치된 노후 슬레이트집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을 지나 어른 한 명이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골목에 들어가니, 성인 눈높이 정도로 낮은 단층집에는 오랜 세월 햇빛과 바람에 삭아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린 회색 슬레이트가 얹혀 있었다. 손으로 쓸어보니 희뿌연 먼지가 묻어 나왔다. 이날은 햇살 내리쬐고 바람이 선선히 부는 맑은 날씨라, 골목 사이사이 ‘석면 지붕’ 밑 빨랫줄에 널어둔 옷가지가 바람에 펄럭였다.
이곳은 옛 주소 ‘수정동 79번지 마을’로 불리는 곳으로 부산진역과 부두 사이에 끼인 100세대도 채 안 되는 작은 동네다. 주민 대부분은 70,80대 노년층으로 2019년부터 최근까지 이 마을에서 석면 피해 인증자 54명, 폐암 특별 유족 3명 나왔다.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석면 폐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대부분 내구연한 30년을 한참 넘긴 슬레이트 지붕을 바꾸지 않아 부산의 마지막 남은 노후 슬레이트 동네로 꼽힌다.
주민 이하자(82·석면폐증 3급) 씨는 동네에 석면 위험성을 가장 먼저 알린 선구자다. 2019년 마을에 온 석면환경보건센터 검진 버스에서 석면폐증을 발견했고 혼자 알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동네 주민을 모아 검진센터에 데려갔다. 이 씨는 10년 전 화재로 두 동강 난 집을 보여주며 “손 대면 가루가 될 지경인 슬레이트 지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온 동네가 이 꼴인데 검진받아서 치료받아도 폐병이 어떻게 낫겠느냐”며 한탄했다.
노후 슬레이트 지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까닭은 지붕 교체 사업의 존재를 모르거나, 비용이 부담되기 때문이다. 주민 강순악(76·석면폐증 2급) 씨는 35년이 넘은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산다. 강 씨는 “석면이 몸에 안 좋은 것은 알지만, 바꾸려면 500만 원도 넘게 든다고 하니 겁나서 교체할 엄두를 못 냈다”고 말했다. 취재진이 차상위 계층인 강 씨는 지붕 교체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자, 강 씨는 “취약계층은 돈을 안 들여도 된다는 사실을 구나 동에서 말해준 적이 없어서 몰랐다.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빈집은 지자체와 동네를 떠난 집주인의 무관심 속에서 삭아가고 있었다. 주민 문계순(42·석면폐증 3급) 씨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한 건물을 반으로 쪼개 두 가구가 사는 구조다. 문 씨는 “절반은 내 집이라 지붕을 고쳤지만, 나머지는 집주인이 집을 비워두고 있으면서 고치지를 않았다. 지붕이 다 쪼개지고 나무가 썩어서 내려앉고 있는데, 내 집을 고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집 없는 설움, 35년 지나 폐병까지 앓아야”
국제신문 취재진이 만난 또 다른 부산 석면 피해자 김모(78·석면폐증 2급) 씨는 “수십 년 세월이 흘러 동네가 사라져도 폐에 박힌 석면조각은 그대로다”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아들 셋에게는 석면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는 김 씨는 남구 문현동 ‘돌산마을’이 2020년 재개발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주민이다.
돌산마을은 부산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으로 석면 피해 인정자가 30명 나온 동네다. 1950년대 공동묘지 터에 6·25 전쟁 이후 오갈 데 없는 피란민이 움막과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이후 1970~1980년대 도시 빈민 마을로 자리 잡았다가 2020년부터 재개발이 진행됐다.
양산부산대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는 무허가 건축물을 지자체에서 강제 철거하는 과정에서 슬레이트 지붕 파손으로 인한 석면 노출이 다수 이뤄진 걸로 보고 있다.
2013년 센터 검진 당시 주민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는 사흘이 멀다하고 동사무소가 무허가 집을 부쉈고, 다시 지으면 부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깨져 쓰지 못하는 지붕은 곱게 빻아 텃밭 흙으로 쓰거나 집 방바닥 재료로 사용했다.
절약이 미덕이던 시절, 석면 지붕은 도시 빈민의 일상 필수품이었다. 동네 비포장 흙길에 뿌려 길을 다지기도 했고, 아이들은 지붕 조각을 분필 삼아 땅바닥에 그림 그리며 놀았다고 한다. 김 씨는 “관에서 나와 집을 10번 때려 부숴도 이사 갈 돈이 없어서 버티고 살았는데, 그 결과가 폐병이라니 인생이 참 덧없다”고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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