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격이 드러나는 날
[세상읽기]
[세상읽기] 임재성 | 변호사·사회학자
‘국격’이란 무엇일까? ‘나라의 품격’ 정도로 풀이되는데, ‘국력’이라는 개념과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국력은 ‘나라의 힘’이다. 경제력, 국방력 등이 대표적인 지표다. 강한 국력이 높은 국격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러시아는 최강 군사력과 풍부한 천연자원, 넓은 영토를 보유했지만, 국격이 높다는 평가는 드물다.
국격의 지표는 다양하겠지만, ‘반성과 책임’도 핵심적인 지표 가운데 하나다. 해당 국가가 스스로 과오를 규명하고, 책임져왔는지로 국격이 평가된다. 같은 경제대국이지만 독일과 일본의 국격 대비는 널리 알려진 사례다. 대한민국은 어떤가.
민주화 이후 35년 역사는 분명 반성과 책임의 역사였다. 대한민국은 수많은 의문사를, 광주5·18을, 제주4·3을,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학살을 밝혀냈다. 적-빨갱이로 낙인찍혀 고초를 당한 수많은 이들이 비록 백발노인이 돼서였지만, 무죄를 받고 만세를 외쳤다. 대한민국은 태극기를 두른 권력이 폭주했던 수치스러운 역사를 대면해왔다. 그런 사회만이 다시는 권력의 폭주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게 나라의 품격, 즉 국격이다.
다음주 수요일인 5월24일, 대한민국 국격이 평가받을 사건이 예정돼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판단할 예정이다.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이 문제를 조사할지 말지, 조사 개시 여부에 대한 판단이다.
진실화해위가 판단할 사건은 1968년 2월24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하미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파월한국군은 하미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135명을 학살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여성과 노인, 아동이었다. 만 10살 이하 아동이 59명(사망자 중 43.7%), 만 6살 이하 영유아가 35명(25.9%), 돌조차 지나지 않은 영아도 6명이었다.
주변으로 도망갔던 이들은 한국군이 마을을 떠난 뒤 돌아와 가족들 주검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하미마을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지는 방식으로 학살했다. 돌아온 가족들은 구덩이 속에 엉켜 있는 주검들을 밤새 풀고 끌어내 땅바닥에 눕혔고, 얇은 흙이나마 겨우 덮어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해가 뜨자 한국군은 불도저를 밀고 다시 들어왔다. 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주검들과 현장을 훼손한 것이다. 주민들은 주검 훼손을 그 무엇보다 원통해한다.
하미마을 학살은 퐁니·퐁녓마을 학살과 더불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공론화된 1999년 이후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 중 하나다. 하미 주민들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학살을 증언했고, 진상조사와 사과를 요구해왔다. 베트남 정부기관이 조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남조선군이 … 심문, 조사 없이 주민인지 베트콩인지 확인하지 않고, 135명 하미마을 주민을 향하여 M70 소총과 수류탄을 퍼부었습니다.” 베트남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가 2010년 작성한 문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135명 사망자가 특정되고, 목격자들의 일관된 증언이 존재하며, 베트남 정부 쪽 조사도 이뤄졌지만, 한국 정부는 학살을 외면해왔다. 2019년 하미 학살 피해자들을 포함해 103명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청원법에 근거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들이 최초로 제기한 공식적 요구에 국방부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학살은 확인되지 않고, 진상조사도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좌절했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2022년 4월 응우옌티탄(66) 등 하미마을 피해자 5명은 진실화해위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1년이 넘게 기다렸다.
진실화해위 판단을 많은 이들이 지켜볼 것이다. 5명의 피해자는 물론, 20년간 대한민국으로부터 외면받아왔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해 자국민의 권리행사는 보장하겠다 천명한 베트남 정부, 한국 과거사 청산이 오직 자국민에게 한정된 선택적 조처였는지 의심하는 외신들도 그 역사적인 판단을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다.
대한민국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본 외국인들에 대해 국가기관이 인권침해 조사에 나설 수 있을까. 만약 진실화해위가 이 중대하고도 역사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조사조차 하지 않겠다고 도망친다면, 이는 곧 국격의 자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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