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어진화사 채용신 선생 '초상화 작품', 정읍시에 기탁

김종효 기자 2023. 5. 16.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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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사' 석지 채용신(1850∼1941년) 선생이 그린 초상화 4점이 전북 정읍시에 기탁됐다.

시는 15일 전주에 거주하는 항일 운동가 김직술의 후손인 김대수 씨와 정읍시 신태인읍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정성섭 씨가 채용신 화가의 초상화 각 2점씩을 시에 기탁했다고 이날 밝혔다.

정성섭 씨가 기탁한 작품 역시 초상화로 정치열·백춘화 부부를 그린 작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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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용신 선생의 초상화 기탁자들와 이학수 시장(가운데)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읍=뉴시스] 김종효 기자 =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사' 석지 채용신(1850∼1941년) 선생이 그린 초상화 4점이 전북 정읍시에 기탁됐다.

시는 15일 전주에 거주하는 항일 운동가 김직술의 후손인 김대수 씨와 정읍시 신태인읍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정성섭 씨가 채용신 화가의 초상화 각 2점씩을 시에 기탁했다고 이날 밝혔다.

김대수 씨가 기탁한 작품은 1911년에 그린 김직술·김환규 부자의 초상화다.

채용신 선생이 그린 이 부자 초상화는 현전하는 예가 많지 않은데다 보존상태가 양호해 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게 평가되는 작품이다.

또 1910년대 채용신의 전성기 작품인 점과 당시 태인 고현내(지금의 칠보)에 있던 김직술집에 머물면서 그린 점은 채용신 선생과 정읍의 역사적 인연을 알려주는 대표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씨는 "집안의 자랑이지만 더 나은 보존환경에서 더 많은 이들이 보고 기억하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를 높임은 물론 조상을 오래도록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해 작품을 기탁했다"고 말했다.

정성섭 씨가 기탁한 작품 역시 초상화로 정치열·백춘화 부부를 그린 작픔이다.

채용신이 그린 부부 초상화 역시 현전하는 예가 많지 않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그가 신태인에 있던 당시 '채석강 도화소'에서 주문을 받아 그린 작픔으로 1930년대 작가의 기법과 당시 병풍 제작기술이 그대로 남아 있어 유물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정성섭 씨는 "어렸을 때부터 제사를 지낼 때 꼭 초상화를 걸었다"며 "집안 대대로 물려 받은 두 점의 초상화가 더 오래 보존되고 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으며 특히 많은 사람이 채용신 선생을 아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학수 시장은 "정읍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초상화를 기탁한 두 분께 감사드린다"면서 "잘 관리하고 보존해 소중한 유산이 후손들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채용신 선생은 서울 삼천동에서 출생해 조선 말기인 20세기 초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초정밀묘사로 머리카락 한 올, 옷 주름 한 자락도 놓치지 않고 사실 그대로의 표현을 잘 살린 최고의 초상화가이자 어진화사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종의 어명으로 태조어진과 칠조어진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참여했으며 하기도 했고 그가 그린 ‘최익현 초상’은 2007년, ‘황현 초상’은 2006년에 보물로 지정됐고 ‘운낭자상’은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1910년 무성서원 일원에 머무는 것을 시작으로 정읍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23년 신태인 육리마을에 ‘채석강 도화소’를 세웠다. 이곳에서 본격적인 초상화 주문·제작 방식의 공방을 운영하며 초상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공감언론 뉴시스 kjh6685@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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