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통조림의 탄생과 나폴레옹의 전쟁(1)
● 황제에 오른 이민자 나폴레옹
흔히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 1769~1821)는 1789년 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변혁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을 때 힘으로 나라를 지배함으로써 유럽에 소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나폴레옹은 지중해 연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과 사르데나(Sardena) 섬 사이에 위치한 코르시카(Corsica, Corse라고도 함)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영토인 아작시오(Ajaccio) 지역의 소지주였으므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1779년에 파리로 와서 학교를 다닌 나폴레옹은 1784년에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세상에 대한 원대한 꿈을 꾸고 있던 나폴레옹은 포병 장교로 임관했고, 1789년에 대혁명이 일어나자 코르시카에서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탈영과 이중국적을 이유로 휴직처리되기도 했다.
1792년에 파리로 돌아와 혁명 후의 혼란 상태에서 왕당파의 반란을 잠재우는 공을 세웠다. 이후에 여러 직위를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고, 체포되기도 하는 등 부침이 있었으나 1795년 10월에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국민공회의 요청으로 폭도를 진압하면서 서서히 권력의 중심에 등장했다. 이후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과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을 이끌고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 결과적으로는 영국군대에 패하여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기억할 만한 첫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인 외에 학자도 많이 데리고 가는 나폴레옹 군대의 특징이 이 원정에서 잘 발휘되어 이집트에서 수많은 문물을 빼앗아 왔다.
현재 파리 시내에 있는 오벨리스크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한 로제타돌,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이집트 문화재가 그 때 훔쳐 온 것이다. 현재는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로제타돌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1802년에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이긴 영국이 전리품으로 이를 받았기 때문이다.
1799년 11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500인회를 해산시킨 다음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면서 독재를 시작했다. 혁명 후 혼란해진 프랑스에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며 1800년에 “불가능은 없다”는 전설을 남긴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알프스를 넘어가는 기상천외의 작전으로 마렝고에서 승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목숨을 건 시민들의 혁명정신을 무시하고 독재를 일삼있으며, 자신의 희망을 프랑스의 목표로 착각하여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804년 12월에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거해야 할 큰 적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1805년 가을에 스페인의 트라팔가르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군과 큰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2월에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에 승리를 거두면서 유럽대륙 중서부를 거의 모두 손에 넣었다.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영국과 무역을 하지 말라는 대륙봉쇄령을 내렸지만 러시아가 이에 따르지 않자 1812년에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비우고 숨어버리는 러시아의작전에 말려들었고, 추위가 빨리 오는 바람에 모스크바를 점령해 놓고도 얻은 것 없이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랑스의 팽창을 막으려는 영국·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1814년 3월에 파리를 점령하면서 그는 이탈리아 연안의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1815년 3월에 탈출하여 파리로 가서 황제에 즉위했으나, 6월에 워털루전투에서 패하면서 영국에 항복했다. 또 탈출할 것을 막으려 한 영국은 그를 아프리카 해안에서 약 1900km 떨어진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했고, 그는 1821년에 세상을 떠났다.
● 역지사지가 중요한 이유-입장이 바뀌면 해석도 바뀔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일생은 전기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글을 쓴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정확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고, 필자의 의도에 따라 판단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나폴레옹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나폴레옹의 전기는 그의 사관학교 시절에 “내가 이끄는 부대가 적군에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적군에 식량이 남아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했다는 말이 뇌리에 훨씬 강하게 각인되었다. 당장은 위기에 처해 있더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기개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이끈 나폴레옹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영웅일 수 있겠지만 프랑스의 팽창을 두려워한 주변국가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이 전쟁광에 불과한, 미국식 민주정치의 기틀은 마련하지 않고 왕정을 대체하여 짧게 독재를 한 인물일 뿐일 수도 있다.
필자의 뇌리에 새겨진 이야기도 ‘얼핏 들으면 기개가 느껴지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판단’일 수 있고, ‘나폴레옹은 가까이 하기에는 다양한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사람’이라는 식의 평가를 할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 초급 장교시절에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가 혼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의 힘으로 왕을 몰아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시민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 상태에서 적어도 100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한 화학자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왕이 통치하는 주변국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정신이 그 나라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던 차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위협을 하고 있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에 오르기 전의 나폴레옹은 권력 대신 국가만을 위하는 사람으로 보였고, 그를 흠모하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한 교향곡 3번에 영웅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베토벤이 악보에 펜을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는 나폴레옹이 권력에 욕심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장군 출신의 다른 정치가와 큰 차이가 없는 나폴레옹의 전기일 뿐이고,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우리나라 전기와 크게 다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의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행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나폴레옹에 의해 벌어진 역사, 사회, 문화는 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 전쟁수행 준비과정에서 발생한 식품산업의 발전
나폴레옹의 장점이라면 첫째는 통솔력이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향할 때 루이 18세의 명을 받아 나폴레옹을 잡으러 간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편에 서서 그의 재집권을 도왔다. 그의 부하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따를 정도였다.
세상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그였지만 전쟁터에서 그는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그의 군대의 특징이라면 건강한 이들을 선두에 세우고 군장을 맨 상태에서 하루에 30km에 가까운 거리를 걸었다. 이렇게 빨리 걸었으니 후방에서 음식을 전해 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나폴레옹은 군인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면, 특히 침략국이 식량을 팔거나 제공할 능력이 없거나 그런 의도조차 없다면 침략은 했지만 피침국민들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인들이 직접 음식을 가지고 가게 했다. 이를 위해 개발된 것이 통조림이었다.
통조림이 개발되기 전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은 군인들이 음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도록 오랜 기간 보존 가능한 방법을 제안하는 사람에게 1만2000프랑의 상금을 걸었다. 이 상의 수상자는 15년 후에나 탄생했고, ‘음식과학의 아버지(통조림의 아버지라고도 함)’라 불리는 아페르(Nicolas François Appert)가 그 주인공이다.
아페르는 1804년, 파리 근처에 식품병 공장을 짓고, 밀봉된 병에 여러가지 식품을 보존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통조림이라면 양철을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19세기 초의 프랑스 양철 제품은 품질이 좋지 않았으므로 아페르는 유리병을 이용했다.
그가 포장한 방법은 병 위쪽에 약간의 공간을 남겨둔 채로 코르크마개로 병을 밀봉하는 방식이었다. 그 후에 병을 끓는 물에 담가 두는 방법으로 요리를 했다. 이 때는 미생물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아페르의 통찰력이 뛰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아페르는 작은 병 대신 큰 항아리를 이용하기도 했고, 밀봉 후에 항아리를 캔버스로 감싼 후 물에 넣고 끓이기도 했다. 그의 방법은 1806년에 프랑스 해군들에게 음식을 공급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아페르의 멸균포장법은 비용이 적지 않게 들었으므로 사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810년에 프랑스 정부는 1만2000프랑의 상금을 지급했다. 아페르는 자신이 연구한 방법을 책과 논문으로 발표했고, 이로써 그는 최초로 식품 보존법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아페르는 경험적으로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고, 수조에서 열을 가하면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있음을 알았지만 장기보존이 가능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쉽게 음식을 보존할 수 있게 했으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810년에 프랑스의 지라드(Philippe de Girard)가 병 대신 깡통을 이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오늘날의 통조림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두란드(Peter Durand)에게 특허를 신청하게 했고, 1812년에 영국의 돈킨(Bryan Donkin)과 홀(John Hall)이 특허를 구입하여 통조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약 반세기가 지난 후 훗날 ‘미생물학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는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음식이 부패하는 이유가 세균이 자라기 때문임을 알아냈다. 그는 우유를 멸균할 때 건더기가 생기지 않으려면 끓이기보다 70℃ 정도의 낮은 온도로 가열하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저온살균법이라 하며 이 때부터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쟁을 치르러 가는 군인들이 음식을 잘 공급받기 위해 보존방법을 찾으려 한 나폴레옹의 계획이 통조림 개발로 이어진 것이다.
(2)에서 계속됩니다.
※ 참고문헌
1. Thomas G Russell, Terence M Russell, reader. Medicine in Egypt at the time of Napoleon Bonaparte. British Medical Journal. 2003;327(7429):1461–1464.
2. Kalea Martin. How Napoleon Influenced The Canned Food Industry. Tasting Table 웹싸이트. 2022. 5. 12 게시(https://www.tastingtable.com/861564/how-napoleon-influenced-the-canned-food-industry/)
3. 버나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2권. 승영조 역. 책세상, 1997
4. Alan Schom. Napoleon Bonaparte: A Life. Harper, 1997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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