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3일 유럽 4개국’ 휩쓴 젤렌스키, 외교 속도전 까닭은? “그에겐 시간이 없다”
NYT “미 대선 앞두고 지원 감소 우려”
‘최대 우방’ 미 정권교체 가능성 고려
유럽과 ‘협력 다지기’···독일 역할 부상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수복을 위한 ‘대반격’을 앞두고 최근 2박3일간 유럽 4개국을 잇따라 방문하는 등 숨가쁜 외교전을 펼쳤다. 이는 1차적으로는 여름으로 미뤄진 대반격에 앞서 동맹국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함이지만, 내년 미국 대선에서 최대 동맹국인 미국의 지원에 변화가 생길 것을 대비해 유럽 동맹들과의 관계를 다져놓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영국을 연이어 방문해 각국 정상과 프란치스코 교황 등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이중 프랑스와 영국 일정은 예고없는 ‘깜짝 방문’이었다. 그는 이번 순방길에 독일로부터 27억유로(약 3조9400억원)에 이르는 최대 규모 군사지원 패키지를 비롯해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각각 경전차·장갑차, 무인항공 시스템을 약속받는 등 수십억달러에 이르는 무기 지원을 받아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프랑스 방문 후 트위터에 “(동맹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크라이나의 국방력과 공격력이 강해지고 있다”고 썼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런 광폭 외교가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향후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1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우크라이나와 독일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미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국제사회의 외교적 지원을 주도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내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할 경우, 서방 동맹국 사이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사실상 붕괴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최대 무기 지원국이다. 올해 초 독일 등 유럽 동맹국들이 전차 지원을 두고 지난한 공방을 벌일 때도 미국이 자국 주력전차인 에이브럼스 지원을 결정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중무기 지원 물꼬를 텄다.
영국의 안보 싱크탱크인 왕립연합서비스연구소 말콤 차머즈 부소장은 “미국 대선이 다가올수록 미국의 약속이 흔들릴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고 있는 것”이라며 “이는 (평화)협상 전에 우크라이나를 가능한 최선의 상황에 올려 놓으려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와 유럽 관리들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외교 무대에서 유럽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과 브라질 등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국가들이 ‘평화 계획’ 수립을 주도하거나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쟁이 종식되는 평화협상을 단호하게 반대해 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두 국가의 ‘중재자’ 역할을 하겠다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나 “우크라이나 편에 서 달라”며 교황청의 중재안을 사실상 거부한 것도 영토 회복 없이 평화협상이 시작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영국 가디언은 전쟁 발발 후 최대 규모 지원안을 발표한 독일의 역할 변화를 조명한 15일자 칼럼에서 “우크라이나에게 유럽, 특히 독일에서의 논의가 매우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젤렌스키는 중국과 프랑스 등이 우크라이나의 입장과 맞지 않는 외교를 과시하는 것을 보고 있고, 여러 국가의 (전쟁에 대한) 여론이 흔들리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의 육중한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미국의 지원 기조가 뒤바뀌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BBC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미국 의회의 초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면서 미 대선 전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NYT는 공화당이 미 하원을 장악한 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재정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날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미 의회가 지난해 말 승인한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대부분을 소진해 올 여름이면 지원이 끊길 수 있다고 전했다.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삭감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지난해 11·8 중간선거로 하원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우크라이나에 ‘백지수표 식 지원은 없다’며 바이든 정부의 지원에 제동을 걸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밝혀 왔다. 지난 2월에는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게 독일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진단했다. ‘과거사 반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온 독일 집권 사회민주당의 관점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최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러시아를 몰아낼 수 있는 반격의 시간이 6~8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가 올해 ‘대반격’에서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내년 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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