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건 없는 사람들의 무기죠”

김은형 2023. 5. 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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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협동조합 윤성호-송현주 감독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를 연출한 윤성호 감독(왼쪽)과 송현주 감독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자들이 짧은 치마 입고 다니니까 위험해지는 거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라도 사람들이 독하잖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장애인들 지하철 시위하면 회사원들이 피해 보는 건 사실이잖아?” 대체로 바르지 않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렇게 운을 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17일 개봉하는 <말이야 바른 말이지>(말바말)는 이처럼 ‘바른말’인 척하면서 비틀려 있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6명의 감독이 각자의 에피소드로 담아낸 옴니버스 영화다. 노사·젠더·지역·동물권·환경 등의 주제로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을 토로하는 대화를 킬킬거리면서 듣다 보면 문득 ‘뼈 때리는’ 현실이 다가온다.

영화 정보를 보면 눈길을 끄는 타이틀이 등장한다. 공동제작으로 이름을 올린 ‘시트콤협동조합’이다. 시트콤협동조합은 2018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웹드라마로 화제를 일으켰던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그새죽)에서 처음 이름을 알렸다. 노조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대신 캐릭터간의 갑을 관계로 빵빵 터뜨리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쇼트폼 형식으로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말바말>은 <그새죽>을 잇는 시트콤협동조합의 두번째 작품이다.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프롤로그’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시트콤협동조합은 정식 조합은 아니고 즉흥적으로 만든 이름이에요. 민주노총 의뢰처럼 혼자 감당하기는 좀 어려운데 포기하기는 아까운 제안이 들어왔을 때 제작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헤쳐모여’ 식으로 만나서 속도감 있게 공동창작을 하는 네트워크죠.” <그새죽>을 함께 했던 이가홍 감독, 송현주 작가(감독) 등과 시트콤협동조합을 만든 윤성호 감독 이야기다.

상업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으니 제작비가 넉넉할 리 없다. 시트콤협동조합은 이런 핸디캡을 창작의 출발점으로 잡는다. “<말바말>은 등장인물 3명, 한 신, 한 장소, 하루에 촬영을 끝낼 것이라는 조건에서 감독들이 각자의 주제를 찾기 시작했죠.” <말바말>에서 프러포즈 이벤트를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손에 손잡고’를 연출한 송현주 감독이 말했다. “쫄깃하고 날씬하게” 속전속결로 작품을 완성해야 하니 손이 빠른 전문가가 필요하다. 촬영·미술·조명 등 감독급 인력은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줄이고 참여하는 대신 스태프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빠르게 해제시키는 게 코미디의 힘”(송현주)이며 “웃기는 건 없는 사람들의 무기”(윤성호)라는 두 사람은 윤 감독이 2010년대 초 웹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호흡을 맞춰왔다. 단편영화부터 시작해 장편 연출로도 주목받았지만 윤성호 감독은 “날렵하고 가성비 있는 방식”으로 일찌감치 웹드라마와 쇼트폼 형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요즘도 쇼트폼 콘텐츠인 ‘숏박스’ ‘너덜트’ ‘피식대학’ 등을 즐겨본다. “말바말 후속편을 찍게 되면 숏박스 팀을 감독으로 모셔오고 싶다”고 할 정도로 현실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데 늘 탄복한다.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진정성 실전편’ .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하지만 시트콤협동조합의 작품들은 현실의 하이퍼리얼리티가 주는 웃음에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을 장착하는 일종의 줄타기 작업이다. 갈라치기는 더 심해지고 ‘피시함(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까지 이어지는 현실에서 웃음과 현실비판이라는 저울의 균형추를 맞추는 건 갈수록 어려워진다. 윤 감독은 요즘 콘텐츠들과 관련해 “현실에 대한 풍자가 계급이나 권력으로 가지 않고 라이프스타일의 묘사에 집중하면서 코미디의 서사가 약해지는 건 아쉽다”고 했다. “이른바 우리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공격받을 때가 있죠. 예전에 만든 ‘두근두근 자판기’라는 쇼트폼에 전학생을 보고 여고생들이 모여서 외모 품평하는 장면이 나와요. ‘여적여’ 구도라 불편하다는 항의 댓글에 공들여 답한 적이 있어요. 현실에서 마주하는 편견과 오류들을 ‘그 상대가 여성이기에’ 미리 지워버린다면 현실 속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일부러 배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지지하는 카테고리의 흠없음을 위해 방부제 처리해버릴 것이 아니라 직시함으로써 그 너머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합니다.”

2020년말 동료에서 부부 창작자로 위치를 조정한 두 감독은 ‘송편’이라는 창작집단도 운영하고 있다. 시트콤협동조합이 게릴라전으로 취지에 공감하는 작가와 스태프들을 모아 속전속결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 제작집단이라면 송편은 좀 더 상업적인 드라마 극본을 개발하고 쓴다. 2021년 오티티(OTT) 드라마 가운데 가장 평가가 좋은 작품 중 하나였던 웨이브의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상청)가 송편이 크리에이터로 이름을 내건 두번째 드라마였다. 송편은 시트콤협동조합처럼 현안을 주제로 내놓지는 않지만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들을 통해 인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뿌리를 더 깊게 파고들어 가다 보면 윤 감독이 교과서로 삼는 <한지붕 세가족> <서울의 달>의 김운경 작가,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김병욱 피디, <아줌마> <풍문으로 들었소>등을 만든 정성주 작가·안판석 피디의 풍자 정신이 녹아있다. 성공을 거둔 <이상청> 시즌2는 안나올까? “정치 드라마의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자주 떠오르는데 아침마다 드라마로는 당해낼 수 없는 뉴스들이 쏟아지네요. 종씨인 먼 친척 아저씨와 뭔가 대결하는 느낌이랄까요? 하하”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옴니버스 영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손에 손잡고’. 서울독립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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