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전문’ 박근형 “이번엔 회사원…소멸해가는 인간 연기”
청바지에 재킷 차림이었다. 1940년생이니, 올해로 83살. 여전히 옷태가 좋았고 눈매는 서글서글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친숙한 원로 배우 박근형이 연극으로 돌아온다. 7년 만의 무대 복귀 작품은 아서 밀러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 15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카페에서 만난 그는 “선배들도 연극을 열심히 하시는데 늘 무대를 향한 향수와 그리움이 있었다”며 “그동안 쌓은 연기 역량을 다 발휘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배우 이순재(88)와 신구(87) 등의 활발한 무대 출연이 자극을 준 모양이다. 오는 21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영화와 드라마 3편에 출연 중인 그는 요즘 대학로까지 오가느라 더욱 바빠졌다. 연극 연습이 오전 11시부터 밤 9시까지 이어질 때도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내면을 끌어내 표현하는 게 몹시 어려워요. 그래서 더욱 도전하고 싶었고요.” 그는 “원래 소멸해가는 인간상을 그린 작품에 관심이 많았다”며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작품이라 기간이 촉박해도 용기를 내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인간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연극에서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나의 은퇴 시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서 밀러를 세계적 극작가로 만든 <세일즈맨의 죽음>은 무너져가는 60대 가장의 복잡한 심리를 파고든다. 성공을 향해 내달렸던 평범한 영업사원 윌리 로만. 하지만 회사에서 퇴출당하고 믿었던 아들들마저 기대를 저버리자 혼돈 속에 소멸해간다. 현대인의 비극적 자화상이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켜서인지 1949년 발표됐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공연되는 작품이다. 박근형은 “소모되는 인간들, 빈부의 격차, 가족의 붕괴 등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우리 사회에 쌓인 여러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더욱 흥미롭다”고 했다.
‘박근형표 세일즈맨’의 특징은 3가지 연령대로 변주되는 목소리 연기다. “망상 속에 중얼거리는 늙은이의 목소리에서 바로 과거 젊은 시절의 목소리로 내려와야 해요. 또, 현실로 돌아오면 60대의 윌리가 되지요. 이게 아주 흥미로워요.” 이 배역은 원래 이순재가 전문이었다. 이순재는 1978년과 2000년에 이어 2016년에도 이 연극을 했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두 연기파 원로 배우의 연기를 비교하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박근형에겐 유난히 아버지 배역이 많았다. 7년 전 출연한 국립극단 연극 <아버지>에서 치매로 모든 걸 상실해가는 늙은 아버지를 연기했고 2016년 영화 <그랜드파더>에서도 자식들과 갈등하는 외로운 노인 역을 맡았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표본 삼아 살아야 한다고 우기고 강요합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비난받으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게 될 거라고 믿는 거죠.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는 “이 작품을 연습하면서 어쩌면 그렇게 내가 살았던 거랑 똑같을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며 웃었다.
배우 전도연과 부녀로 출연한 적도 있다. 일일극 <사랑할 때까지>란 작품이다. 당시 박근형은 “너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대사만 읊는 앵무새”라는 쓴소리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 일화를 묻자 박근형은 “야단친 게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내적인 연기를 끌어내려면 과거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라’고 조언을 한 거죠.” 그는 “지금은 국제적인 대배우로 성장하지 않았느냐”며 “최근 영화 <길복순>도 봤는데 너무 잘하시더라”고 했다. 전도연도 최근 예능 프로그램에서 “처음엔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따뜻한 조언으로 느껴졌다”며 박근형에게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엔 ‘박근형 연기인생 60년 기념’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1963년 한국방송(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드라마와 영화로 친숙한 그지만 그의 뿌리는 연극이다. 휘문고 연극부를 거쳐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무대에 섰으니, 정확히 따지면 그의 연기 인생은 65년을 맞았다. 3년 동안 국립극단 간판 배우로도 활약했다. “젊었을 땐 무대가 꿈이었고, 노년이 된 지금은 희망이에요. 꿈과 희망을 꽉 붙들고 매달려야죠.”
이번엔 회사원을 연기하지만 그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는 기업 회장님 배역이다. 그가 ‘회장님 전문 배우’가 된 사연이 있다. “저는 연극에서 ‘역할 창조’라는 걸 중히 여겨요. 어느 날 회장님을 연기하는데 그 역할을 극대화해서 적극적으로 연기했더니 특이하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 뒤로 자꾸 그 회장님을 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는 “회장님보다 소외되고 상실해가는 인간을 연기하는 작품, 문학 작품을 선호한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문학작품 출연작으로 이광수의 <무명>과 이상의 <날개>, 그리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꼽았다.
그는 “지금도 수십 가지의 역할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다”며 열정에 넘쳤다. “연극은 나이 들고 인생 경험이 풍부해야 잘할 수 있는 역할들이 많더라고요. 이 작품을 잘 마치고 자신감이 붙으면 욕심을 더 내보려고요.” 그는 “3시간이나 되는 극을 혼신의 힘을 다해 뛸 수 있는 체력이 될까 걱정했는데 아직은 괜찮은 것 같다”며 “필요하지 않아서 부르지 않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생각”이라고 했다.
창작극 개발과 배우 육성, 국립극단의 역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케이(K)드라마, 케이(K)팝을 내세우며 우리 것이 세계적이라고 하는데 밑바탕은 탄탄하지 않아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젊은이들 한 달에 28만원 받으면서 네다섯개 직업을 뛰고 있는데, 이 젊은이들 죽일 일 있습니까.”
그는 “상금도 많이 내걸고, 희곡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국립극단은 단기 비정규직이 아니라 예전처럼 60여명씩 뽑아 밑거름을 만들어야죠. 연극계에 나오는 수많은 청년이 갈 길을 넓혀줘야 합니다. 배우 출신 문화부 장관이 두 명이나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나오지 않았느냐”며 “정부 지원이 너무 인색해요”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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