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전두환 때가 살기 좋았다”고?···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소설가 정아은은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화두로 글을 쓰는 동안 종종 두려웠다고 말한다. “지지하는 이들은 ‘네가 지금 누구 덕에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글줄을 쓰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그를 증오하는 이들은 희대의 악인을 사람으로 취급하며 글을 썼다는 사실에 화를 낼 것 같았다.”
사는 내내 ‘무서운 사람’이었던 ‘전두환’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느꼈다. 1980년대 초등학생이었던 그는 어느 날 ‘전두환 물러가라’고 칠판에 적은 담임 선생이 이틀 뒤 학교에서 사라진 뒤 한참 지나 다리를 절며 모습을 드러낸 걸 기억한다.
1980년대엔 “대기 중에 만연하던 폭력의 기운” 때문에 두려웠다. 어른이 되고는 “그 기운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사이드웨이)은 그 두려움을 뚫고 내놓은 결과물이다. 정아은은 전두환을 제대로 ‘단죄받지 않은 악인’으로 규정하면서도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리더십과 소탈한 매력이 넘치는 밝은 사나이’와 ‘살아있는 인간의 육신을 으스러뜨릴 가능성을 물씬 내포한 명령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는 사나이’라는 모순된 얼굴의 실체를 추적한다.
추적 이유 즉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노골적인 폭력으로 국가 공동체를 유린하고도 천수를 누리다 간 사내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전두환 사후에 대한민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아은은 전두환이 한국 사회에 남긴 상흔과 족쇄를 확인하려 전두환 인격과 삶, 시대·문화 상황에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파고든다. 그는 책을 “전두환이라는 특별한 개인의 내재적 관점과 그가 속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라는 외재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영광’과 ‘모순’, ‘몰락’과 ‘악의 기원’이라는 네 개의 분석 틀로 책을 구성했다.
전두환은 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2년 수감 등을 빼면 자유롭게 살다가 아흔한 살에 죽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국민을 학살한 자가 국가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몇 년간 유지했다는 사실, 대량 살상의 전략이 있는 자가 퇴임 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과 자유를 유지한다는 사실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정체성을 흔들어놓는다.”
퇴임부터 사망까지 ‘33년’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아은은 여러 분석 결과와 추론을 내놓는다.
중범죄자가 임기를 채워버렸다
정아은은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단죄받지 않고 유복하게 여생을 보내는 현실은 우선 범죄자가 임기를 채웠다는 사실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대통령’인 상황이 하루하루 연장될수록, 그의 존재는 ‘기정사실’이 되어간다. 그가 되돌릴 수 없는 실체가 되어가는 과정은 차근차근 진행되며 공고해진다.” 주한미군사령관이 이 범죄자를 만나고,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로널드 레이건이 우방국 대통령 자격으로 초대한다.
8년 동안 한 국가의 최고 결정권자로 군림하며 곳곳에 제 세력을 심었다. 전두환 권세에 힘입어 고위직에 오른 한국 사회 의사 결정권자들은 그를 단죄해야 한다고 당당히 외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언론통제와 조작 아래 놓인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내놓는 메시지를 보며 “그가 강직하고, 리더십 있으며, 청렴하고, 그러면서도 소탈하고 유머 감각 있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정아은은 이런 이미지가 먹고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야 하는 사람들,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이들에게 더욱 여과 없이 전달된다고 분석했다. 즉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를 파헤쳐 볼 만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이들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사람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 순응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대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누구도 선(線)을 지키지 못했다
정아은은 ‘전두환을 단죄하지 못한 진정한 이유’라는 제목의 장에서 “전두환이라는 ‘악(惡)’이 나타났을 때, 아무도 제 구역을 지키며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퇴임 후 33년 동안 전두환이 무릎 꿇지 않고, 또 한국 사회가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한 이유도 “전두환이라는 명확한 ‘악’을 단죄하는 일에, 누구도 사익(私益)을 희생하며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인이 악을 처단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국회의원이 처단되지 못한 거대 악을 단죄하기 위해 입법을 하고, 검사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를 집요하게 추적해 법정에 넘겼다면, 그에 대해 판사가 바른 판결을 내렸다면, 전두환은 제대로 된 단죄를 받았을 것이다.” 국회는 법을 만들지 않았다. 검사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불기소처분을 했다가 몇 개월 뒤 행정부 수반의 의지를 따라 다시 기소하는 촌극을 벌였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특별사면 결정의 대가
김대중과 김영삼의 문제 즉 전두환 특별사면 문제도 놓였다. 정아은은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현직 대통령이던 김영삼을 설득해 전두환을 특별사면하도록 한 조치를 두고 “현대사를 곱씹을 때마다 탄식하게 되는 아쉬운 선택”이라고 말한다. 우선 전두환은 투옥 22개월 만에 풀려났는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희생자와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정아은은 김대중의 이런 선택의 근원을 1987년의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에서 찾는다. “김영삼은 3당 합당이라는 형태로, 김대중은 김종필 세력과의 연합이라는 형태로 죗값을 치렀다. 그리고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사면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함께 나누어 들었던 공통의 죄과였다.”
김대중은 지역주의 타격을 입은 피해자였다. 군부 세력의 여론몰이와 정보 조작으로 ‘지역주의자’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정아은은 ‘지역주의자 이미지’가 전두환 사면을 선택하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이라고 본다. 세 번째는 “엄청난 강도의 시련을 연이어” 겪으며 인격의 성숙을 이룬 김대중이 “무지막지한 어린아이를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한다. 네 번째 김대중의 이해득실이다. 1997년 대선 당시 득표를 위해, 당선 뒤 국정 운영 동력 확보를 위해 “영·호남의 해묵은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지름길은 전·노 사면을 통해 5·18 민중항쟁 문제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것밖에 없다”라며 선심성 공약을 내걸었다고 본다.
그래도 전두환 때가 살기 좋았지
전두환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자화자찬했던 물질적 풍요의 시기”에 퇴임했다. “경제는 잘했다”는 말은 전두환을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1980년대 중후반 경제 성장은 3저(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호황 등 외부 요인 덕이 컸지만, 이를 온전히 전두환 덕으로 여기는 인식이 퍼져 있다. 전두환이 등장한 국군의 날 행사 유튜브 영상엔, ‘경제 대통령’이니 ‘전땅크’니 ‘강하고 유능한 군인 대통령’ 같은 댓글도 붙는다.
정아은도 한때 머릿속에 전두환이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 그렇지만 통치는 안정적으로 잘했던 사람’이라는 전형적인 이미지로 고착됐다고 말한다.
정아은은 경제나 통치 면에서 전두환을 긍정 평가하는 근원에는 1980년대 한국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믿음이 있다고 본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무인이 버티고 서 있기에 공동체 내에 혼란이 없었고, 그를 바탕으로 경제가 발전해 윤택함을 누릴 수 있었다는 믿음”이다. 정아은은 의식주에 대한 불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면에서, 그 믿음은 분명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전두환을 찬양하고, 낭만화하는 퇴보적 현상의 원인도 연결해 분석한다. 정아은은 퇴보와 역행을 “대한민국이 1990년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후 국민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지, 그래서 과거 개발연대 시절의 ‘강력한 국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또한 1980년대의 공동체적인 소속감과 유대감을 얼마나 희구하는지 역설적으로 반증한다”고 했다. 전두환을 낭만화하는 것은 “먹고살 길을 도모하며 1인분의 책임을 해내기도 벅찬 시절을 사는 원자화된 개인들이, 표면에 맺히는 현상들을 비교하며, 지나가 버린 시절의 향기를 그 시절의 지도자였던 한 인물에게서 기원한 것으로 오인하는 것”으로 본다.
전두환에 대한 측은지심의 이유
정아은은 전두환이 백담사에 머물 때, 사람들이 그곳으로 찾아가 위로와 지지를 표명했던 장면도 되돌아본다. 그 심리를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운명 앞에 선 유한한 인간들은 크고 강해 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초라한 신세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급격히 공명”하는 즉 인간의 내면의 보편 심성인 측은지심(惻隱之心)에서 찾는다. 그리고 무지의 측면도 있다. “약자로 변한 강자의 과거 행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혹은 ‘잘’ 알 필요가 없었던 이들은 기꺼이 하게 되는 일이었다. … 자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이 팬티 차림으로 고문당하거나 대검으로 난자당하는 경우를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음 편히 머리카락을 잃은 삼손을 가엾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의지가 박탈된 시기
전두환의 통치 시기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 영역인 정치적 자유의지를 박탈당한 시기였다. 5공화국의 자유는 “배고픔에 포박된 상태로부터의 자유였다.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밤새 돌아다니며 유흥을 즐길 자유였다. 색채로 가득 찬 자극적인 스크린과 브라운관 화면을 보고,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낯선 공간의 공기와 음식을 맛볼 자유였다. 한 마디로, ‘몸’ 혹은 ‘감각’과 관련된 자유였다”고 말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가진 자원을 배분하는 데 의견을 낼 자유, 공동체를 대표할 사람을 뽑을 자유, 공동체가 가진 문제점에 대해 발언할 자유는, 눈에 보이지만 손댈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전두환의 핵심 특성 ‘가벼움’
책은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 평전으로 볼 수 있다. 정아은은 <전두환 회고록>과 <전두환 육성 증언>을 반복해 읽고, 육사 출신 인사들을 인터뷰하며 ‘전두환의 핵심 특성’을 뽑아낸다.
전두환은 “말로 해결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기 앞서 실천으로 옮기고 보는 아버지의 행동파적인 기질”과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물려받았다.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킨 뒤 그들을 인간 말종으로 타자화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영웅시한 ‘괴물 전두환’”이 잉태된 토양은 세 가지로 정리했다. 1) 타고난 적극성, 2) 가난이라는 결핍, 3) 군인으로서 받았던 교육. 정아은은 “위인을 탄생시킬 수도 있는 비옥한 토양에서 전두환의 장점들은 기형적으로 변형되어 희대의 악으로 연결됐다”고 말한다. 책은 구체적 사례를 분석한다. 전두환이 박정희 쿠데타 때 육사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정아은은 이 일화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욕망, 다른 이들보다(공사나 해군보다 우리가 먼저!) 앞서서 해내고 싶다는 승부욕, 생면부지의 고위 인사를 찾아가 손을 내미는 자신감, 자신이 가진 유리한 배경 조건(육사 참모장의 사위라는)을 민첩하게 알려 상대의 호감을 사는 주도면밀함,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면 즉시 방향을 바꿔 다른 길로 달려가는 기민함, 실패할 경우를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는 저돌성, 자신을 받쳐줄 세력을 만들어내고 이끄는 조직 장악력, 사후에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노련함” 등을 찾아낸다.
정아은은 “문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이든 다 해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뜻을 관철시키며 승승장구한 전두환에게는, 겸손이나 성찰, 반성 같은 덕목을 일깨워 줄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도 “반대 의견을 내거나 리더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위압해 상대의 입을 다물어 버리게 하는 유형”이었다.
‘북한 폭도론’과 ‘참회 비스름한 태도’
광주에 대처하는 전두환의 태도도 여러 차례 바뀐다. 재임 초반에는 북한 운운 폭도론, 중·후반과 퇴임 초기에는 참회 비스름한 태도(그러나 온전한 의미의 참회는 아닌), 복역 뒤부터는 북한 운운 폭도론으로 회귀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임기 중 18차례 광주를 방문했다. 참극이 발생한 장소에서 “내가 광주 시민을 특별히 아낀다”라는 발언도 했다. “돌아서서 삼청교육대를 운영하고, 학원안정법 제정을 기도하고, 천여 명의 대학생을 체포”한다. 1986년 1월부터 1988년 2월까지를 기록한 649쪽짜리 <전두환 육성 증언>엔 “사람을 잡아 가두거나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폭력행위를 가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거부감이나 죄책감을 갖지 않는 전두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온다.“법적 근거 없이 사람을 잡아들이려 들고, 시위 진압에 군 병력을 투입하려 들고,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한데 모아 ‘정신 개조’를 하려 들었다.”
정아은은 ‘참회 비스름한 태도’를 두고 “최고 권력자로서 위신이 섰다는 느낌을 받자 광주에 대해 상식선에서 생각하고 인간 선의의 평균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광주 방문과 삼청교육대 운영이라는,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내보이는 전두환의 인간 유형을 두고 ‘가벼움’이라는 키워드로 진단한다.
“정신세계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막의 존재 덕에 그는 평생 심각함, 고뇌, 죄책감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현상의 표면에 머무르며 극미량의 감정을 느끼다가 즉시 빠져나가는 능력, 즉 ‘가벼움’을 장착한 채 이승에서의 여행을 마쳤다.” 이 가벼움은 초고속 승진, 끝까지 버텨낸 대통령 재임, 사과와 반성 부재를 관통하는 특질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자기 죄를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는 ‘무성찰 무반성 전략’에 끝까지” 매달렸다.
대통령 임기의 3분의 1이상 채우면 혜택을 주라
전두환이 평온하기만 했을까. 정아은은 “임기 초반부터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자신이 언제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사후에 제 가족이 단죄당하게 될 것을 두려했다”고 말한다. 전두환은 1981년 말부터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입법 작업을 촉구했다. 그해 박철언에게 “임기의 3분의 1 이상을 마치고 임의로 퇴직하는 경우에도 예우와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임기를 도중에 끝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의 반영이라고 추론한다.
1988년 2월 청와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던 전두환은 이순자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첫 경험인 만큼 누구도 퇴임 대통령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는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 주던 권력의 갑옷을 벗어버리고 황야로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요.”
정아은은 “다시는 입성하지 못하게 될 공간에서 뒤척였던 이날 밤 전두환의 뇌리를 스쳐 갔던 상념들에는, 이후 그가 33년 동안 맞게 될 광활한 시공간이 압축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무정형성과 무규칙성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시공간”이라고 했다. “피 묻은 손으로 권좌를 훔친 육군 소장이 평화로운 외양으로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 사회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도 완전한 백지상태에 놓여 있었다.” 백지상태가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이제 모두가 안다. 정아은은 “대한민국 사회는 그 문제에 대해 당면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즉흥적으로 대처하며 33년의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그 전임 대통령이 자유로운 상태로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장면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했다.
전두환 마지막 33년의 후과
전두환이 만약 용서를 구했다면?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을 것이다. 용서하는 사람이 있고,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라는 선택지가 생겨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두환은 한 번도 그 선택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정아은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더 커다란 죄를 낳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죄의 부피에 압도되어, 전두환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갖고 있었을 ‘부분적인 미덕’이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아은은 반성 없이 살다 간 전두환의 33년이 남긴 후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뉘우치지 않고 간 거악(巨惡)의 존재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황을 있었던 그대로 들여다보고 정확하고도 면밀하게 각각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 과거와 현재를 구분해 과거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나갈 토대로 삼을 수 있게끔 방향을 설정하는 법, 이상과 현실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현실에 적합한 선에서 이상을 지혜롭게 실현하는 법, 누군가를 ‘절대 악’으로 설정해 희생양으로 삼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는 법과 같은,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반드시 보유해야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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