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이게 정치다” 노련한 밀당으로 개혁 이룬 김육
서로 반대만 하고 어떤 성과도 못 내는 여야가 배워야할 인물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
1659년 윤삼월. 국왕 효종은 신하들과 대화하다 반년 전 죽은 김육(金堉)이라는 신하를 떠올리며 슬퍼했다. 왕의 굳건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정작 효종은 생전에 김육을 놓고 ‘고집이 세다’는 불평을 토로하곤 했다. 효종은 김육이 없는 자리에서 “죽을 때나 고칠 병”이라는 뒷담화(?)도 했다.
“저를 쓰려면 대동법을 시행하시라”
왕은 왜 성격을 마뜩잖아하면서도 그를 신뢰했을까. 김육의 고집스러운 성격에는 세상만사를 두루 섭렵한 경험과 자수성가한 사람이 가지는 자신감이 결부돼 있다. 김육은 어린 시절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자라난 소년가장으로 자기 힘으로 가문을 일으켰다. 과거 합격 뒤 성균관에 있을 때 광해군의 정책에 반발해 낙향, 10년간 가평에서 은둔생활을 했고 인조반정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갔을 땐 주로 지방관리로 일하며 두루 현실과 마주했다. 실록은 김육을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났다”고 평했다.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달력을 개선했고 수차를 보급했으며 상업 진흥을 위해 화폐 유통을 시도했다. 아이디어가 풍부했고 정책에 능통했다.
그런 김육이 일생을 걸고 추진한 사업이 대동법이다. 그는 자신을 기용하려던 효종에게 공개적으로 “저를 쓰려면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하면 대동법은 복잡한 세금체제를 단일화해 ‘쌀’로만 내게 하는 정책이다. 시행 뒤 조선왕조 최고의 재정개혁이라 불렸지만 세금체계를 전반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조선의 빈약한 유통망에서 일괄로 걷은 대규모 쌀을 운송하는 어려움도 상당했다. 무엇보다 가진 자에게 세금을 더 걷는 대동법은 권력층의 반발을 사기 십상이었다. 조정 내에선 기존 예산안(공안)을 재검토해 줄이는 게 답이라는 반대파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곤 했다.
‘고집이 센’ 김육은 이 반대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대동법에 가장 크게 반대한 호조판서 원두표를 실각시켰고, 또 다른 반대파인 김집을 여러 차례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김집은 동생(김반)의 친구인 김육의 공격에 결국 조정을 떠난다. 김육은 법안 시행을 망설이는 효종을 여러 차례 압박했다.
정면 돌파 뒤에는 ‘유연함’이 있다. 김육은 원두표를 여러 번 공격하면서도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를 위한 사당을 짓자고 건의했다. 원두표의 반대 수위를 관리하는 수완을 보인 것이다. 김집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게 관리했다. 김집은 이후 김육과의 대립은 정치적 차원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육은 자신의 ‘고집’으로 대동법을 밀어붙였지만 대동법 실시에서는 불필요한 갈등을 차단하는 노련함을 보여줬다. 노련함은 결실로 이어진다. 대동법은 1651년 충청도를 시작으로 1658년 전라도 해안지역 등으로 확대되고 결국 전국에서 시행된다.
시동조차 걸리지 않은 3대 개혁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 보여준 김육의 노련함은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좋은 정치란 당대 과제에 해법을 제시하고 관철하는 것이다. 김육의 ‘고집’과 ‘유연함’은 결국 대동법이라는 해법을 만드는 토양이 됐다. 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 정치는 김육이 제시한 이 ‘좋은 정치’에 다가갔을까. 최근 광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1년차. 많은 언론이 평가하는 현 정부의 1년은 대결과 협치 실종이다. 보수 언론도 진보 언론도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지언정 제대로 된 여야 간 대화와 협의, 합의가 없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윤 대통령은 취임 뒤 지금까지 야당 지도부와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대선 경쟁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불편함을 넘어서 이 대표의 검찰 수사를 이유로 만남을 회피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은 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와의 만남을 먼저 추진하려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거대 야당은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시작으로 장관해임건의안, 양곡관리법 등을 단독으로 밀어붙여 처리했다. 소수 여당은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야당 사이를 중재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양쪽 모두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기는커녕 자신들만의 정치를 계속하고 있다.
이 1년간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1년 동안 대한민국 정치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내세우는 3대(연금·노동·교육) 개혁 입법은 시동조차 걸리지 않고 있다. 야당이 내세우는 노란봉투법 등 민생 입법 역시 국민의힘 반대에 부딪혔고, 대통령실 거부권 가능성도 살아 있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감정적 반응, 무조건적인 반대와 선악에만 기댄 정치 행태다. 그 정치의 밑바탕에는 그래야 2024년 총선에서 지지층을 결집해 승리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 설령 총선에서 국민이 한 정치집단에 손들어줬다고 치자. 현재 이 상황이 개선된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미-중 패권 경쟁이 뚜렷해지는데 대한민국 정치는 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가.
좋은 정치는 결실을 만드는 것
17세기 조선은 모든 면에서 위기였다. 국왕의 권위는 청나라 황제 아래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땅에 떨어졌다. 사대부는 위신이 떨어진 조정에 나와 일하기를 꺼렸다.국가 기강의 척도인 조세제도는 문란했다. 군대는 허약했다. 위기의 시대 조정의 ‘키’를 쥐었던 김육은 풍부한 현실감각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반대파를 배려하는 노련함으로 정치적 과실을 얻었다.
역사가 김육을 명재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백성을 위하는 태도를 보여서만은 아니다 . 그가 ‘ 대동법 ’ 이라는 실천적 결과물을 냈기 때문이다 . “ 모든 일은 실질적 결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 는 김육의 말을 400 년 뒤의 지금 , 상대방과의 대결만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이 땅 위의 모든 정치인에게 들려주고 싶다 .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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