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 김병철, ‘장진구 같은 놈?’..강석우 찌질계승자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2000년대 초반엔 “이 장진구 같은 놈!”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2000년 9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아줌마’(정성주 극본, 장두익·안판석 연출)가 시청률 30%를 넘기며 공전의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유행어의 주인공 장진구는 당시 강석우가 맡아 열연했다.
20년이 지난 2023년엔 그 유행어의 주인공이 JTBC ‘닥터 차정숙’의 서인호(김병철 분)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아직 장진구 경지에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서인호의 찌질함도 그에 버금갈만큼은 따라붙은 것으로 보인다. ‘아내의 자격’(2012)의 눈치 빤한 기레기 한상진(장현성 분)이나 ‘밀회’(2014)의 철없는 떼쟁이 강준형(박혁권 분) 등도 있지만 서인호가 그 중 돋보인다.
장진구와 서인호의 찌질함은 싱크로율이 상당히 높다. 둘은 각각 오삼숙(원미경 분)과 차정숙(엄정화 분)과의 원나잇이 임신으로 이어져 결혼했다. 전적으로 사랑과는 무관한 호르몬의 장난이었다.
차이점은 있다. 족탈불급의 찌질이 장진구는 당시 오삼숙과의 결혼을 ‘지식인과 기층민의 이상적 결합’이라고 규정했었다. 내기당구에 진 것이 분해 고주망태가 된 채 친구 집을 찾았다. 친구의 고졸 여동생 삼숙이 부축했다. 욕정이 발동했다. 때는 1987년. “아, 살아있는 부끄러움이여!”따위 시대의 아픔에 고뇌하는 지식인을 연기했다. 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임신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결국 삼숙을 ‘기층민’으로 규정해 허세만이라도 만족시켜야 했다.
서인호의 경우는 본인만의 문제는 아녔다. 발 삐끗한 차정숙을 부축해 산길을 내려왔다. 장시간의 스킨십이 둘 사이를 이미 야릇하게 달구었다. 민박집 주인 아줌마가 방을 후끈 뎁혀주는 오지랖을 부렸다. 옷을 벗고 싶었고 발목을 찜질해주며 맨살까지 마주했다. 두 사람 모두 어떤 수작도 필요치 않았다. 다만 서인호에겐 오랜 첫사랑 최승희(명세빈 분)가 있었을 뿐이다.
장진구는 결혼생활 내내 못배운 오삼숙을 구박했다. 식구들과 합세해 가스라이팅도 병행했다. 서인호는 그러지 못했다. 공부는 차정숙이 더 잘했다. 다만 오삼숙만큼 차정숙도 착해서 현모양처의 길을 알아서 걸었다. 장진구에게도, 서인호에게도 아내 오삼숙과 차정숙은 오래된 안락의자처럼 익숙한 존재였을 뿐이다.
그 중년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장진구에겐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동기 한지원(심혜진 분)이, 서인호에겐 첫사랑 최승희가 같은 교수, 같은 의사 신분으로 옆자리에 안착했다. 이 대목에선 서인호가 한 발 앞섰다. 이미 미국 연수시절 최승희를 다시 만나 둘째 딸 서이랑(이서연 분)과 동갑인 혼외자 최은서(소아린 분)를 낳았으니.
찌질이들답게 심보도 고약하다. 평소엔 있는 줄도 모르다가 없어지려니 애틋하고 아쉬워한다. 장진구는 이혼한 오삼숙 옆에서 주방일 하는 김봉환(정재환 분)이 거슬리고 서인호는 때없이 차정숙 편을 드는 로이 킴(민우혁 분)이 눈꼴 시다.
찌질이답게 일처리도 치밀하지 못하다. 장진구는 친구 박재하(송승환 분) 단속도 못해 불륜이 들통난다. 서인호는 제 명예 지키자고 비밀로 한 차정숙과의 부부관계를 술에 취해 제 입으로 실토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장진구는, 마누라는 이혼으로 떠나보내고 내연녀 한지원은 친구 박재하에게 새치기 당해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서인호도 차정숙이 혼외자 최은서의 존재를 알았으니 이혼이 코 앞이고 내연녀 최승희도 미국행을 결심했으니 같은 신세가 목전이다.
14일 방송된 10회에서 남편의 혼외자 최은서의 존재를 알고 상심에 빠진 차정숙을 전소라(조아람 분)가 차에 태운다. 현모양처로 살아온 차정숙으로선 아들 서정민(송지호 분)의 선배이자 여친인 전소라가 심히 불편했다. 말투도 거칠고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매정함도 정이 안간다. 가당치도 않게 외제 오픈카를 끌고 다니는 씀씀이도 탐탁찮다.
답답한 김에 얻어타 보니 그래도 한결 심화가 가라앉는다. 그 와중에 전소라의 “죽여버리고 싶잖아요. 그 년놈들.” 한마디에는 체증을 쓸어내리는 통쾌함마저 느낀다.
차정숙 보기에 싸가지 없는 전소라는 누군가를 전제한 현모양처 따위엔 관심도 없다. 그저 제 인생을 이미 굳건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차정숙의 며느리 될 생각따위는 1도 없다. 다만 자신이 목격한 서인호-최승희 불륜의 피해자 차정숙을 같은 여자로서 살짝 연민했을 뿐.
빗속을 뚜껑 열린 채 젖어가며 달리는 차정숙은 환호성을 올리며 심화를 풀어낸다. 아내, 며느리, 엄마 등 그녀를 옭아맸던 숱한 ‘노릇들의 사슬’을 끊어내기라도 하듯. 차정숙은 홀로서기할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아줌마’의 오삼숙은 연적이었던 한지원과 친구가 된다. 개업식 첫 손님도 한지원였다. ‘오리알’ 장진구를 더욱 장진구스럽게 만드는 설정였다. 닥터 차정숙도 닥터 최승희와 친구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또 오삼숙은 결국 김봉환과 남녀로 맺어지지 않았다. 차정숙도 로이 킴과 그렇게 맺어지지 못할까? 기왕에 홀로서기인데 친구이상의 관계는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차정숙도 못해본 연애, 못해본 사랑 한번 해볼 수는 있는 일이니까 의문부호로 남겨둘만 하다. 20년전과는 시대도 바뀌었으니.
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란 뻔뻔함과 아전인수식 궤변, 이기심과 질투로 똘똘 뭉친 서인호만큼은 장진구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라서 그렇겠지만 어쨌거나 20년 전 장진구도, 2023년의 서인호도 그 찌질함이 웬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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