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조종석 뒤에서 손으로 폭탄 던져야 했다” [70th 창사기획-한미동맹 70, Alliance Plus]

2023. 5. 1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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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영웅 김두만 전 공참총장
공군 주춧돌 놓은 살아있는 전설
“중국 러시아 눈치볼 때가 아니다”
“한미일, 첨단 무기체계 만들어야”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이 10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 7~8위권 공군 강국이 된 대한민국의 기적은 미국의 원조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중국, 러시아 눈치 보는데 그럴 때가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지금 우리가 결심해야 해요. 한미동맹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김두만(96·예비역 대장) 전 공군참모총장은 6·25전쟁 당시 전투기 한 대 없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히는 공군력을 보유하게 되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까지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인 최초로 100회 출격을 기록한 그는 6·25전쟁 후반부터는 후진 양성에 기여하고 1970~1971년 제11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는 등 대한민국 공군의 주춧돌을 놓은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김 전 총장은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 대립 구도가 심화되는 현 국제질서 속에서 6·25전쟁을 겪고, 한국 공군의 초석을 닦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앞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먼저 “균형외교라는 말이 나오는데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며 “이제는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같은 전체주의 세력과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민주주의 세력의 대결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양쪽을 모두 왔다 갔다 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국익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모든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또 “중국 눈치 보고, 러시아 눈치 보고하는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면서 “우리가 지금 눈치 볼 때가 아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계속해서 “무엇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어떻게 있게 됐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6·25전쟁 때만 해도 우리가 북한보다 훨씬 못 살았는데 오늘날 어떻게 됐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70년이 지난 지금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대해 기적이라고 한다”며 “공군만 봐도 그렇다. 6·25전쟁 때 겨우 훈련기만 갖고 있던 공군이 지금은 세계 7~8위권의 막강 공군, 대단한 공군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결국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도움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서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지원으로 한국이 경제에 모든 재원을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적을 이룬 것인데 이런 기적을 계속 유지하려면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미일 협력 확대 필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이 주축이 돼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호주 등이 스텔스전투기 F-35 개발을 위해 통합공격전투기(JSF)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을 거론한 뒤 “결국 F-35를 도입하게 돼 다행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국도 그때 프로젝트에 참가했으면 했다”며 “첨단 무기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일이 함께 첨단 무기체계를 만들고 우리 기업들이 그 과정에서 앞장서야 한다”고 밝혔다.

한미동맹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가 직접 겪은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운명의 날, 당시 김두만 중위는 휴일을 맞아 외출을 나왔다 전쟁 발발 사이렌과 군인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길거리 방송을 듣고 서울 여의도 공군기지로 황급히 돌아갔다.

당시 한국 공군은 L-4, L-5 연락기와 T-6 훈련기 10대를 합쳐 총 20여대에 불과한 전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기지로 복귀한 그의 눈앞에서는 적 항공기의 공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북한 조종사들의 조종 미숙과 사격실력 부족으로 T-6 훈련기 10대 가운데 1대만 파손됐을 뿐 9대는 건재했다.

L-5 연락기를 타고 정찰비행 임무를 수행하던 김 전 총장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 27일부터 T-6 훈련기를 타고 짧은 비행연습을 거친 뒤 곧바로 출격에 나섰다.

그는 “연락기에 폭탄을 달 수가 없어 뒷좌석 조종사가 양손에 한 발씩 두 발을 갖고 저고도로 비행해 적 상공에서 손으로 던져야 했다”며 “그래도 훈련기는 날개에 폭탄 열 개를 달 수 있어서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열악한 환경에서 분투했지만 북한의 전격 남침으로 인해 전황은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북한이 서울에 이어 시흥까지 내려오면서 공군은 여의도에서 수원으로 철수한 데 이어 다시 대전까지 밀려났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6월 25일부터 26일, 27일까지 사흘 동안 완전히 절망적이었다”며 “나도 언제인지가 문제이지 완전히 죽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한 점 희망조차 기대할 수 없었던 암담한 상황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참전 소식이 전해진 29일 반전을 맞이했다.

김 전 총장은 폭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유엔군 참전 ‘삐라’를 폭탄 대신 훈련기에 싣고 북한이 점령한 서울 상공에 뿌렸다.

그는 “29일 미군이 참전한다, 유엔군이 참전한다는 연락을 받고 그날 저녁 일본에서 인쇄한 유엔군 참전 소식을 담은 삐라를 훈련기를 타고 가 서울 상공으로 가서 뿌렸다”면서 폭탄이 없으니 삐라라도 잔뜩 뿌려주자는 심정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김 전 총장은 이후에는 기종전환 교육을 받고 미국이 지원한 F-51 무스탕으로 옮겨탔다. 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후송한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며 역시 한미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된 딘 헤스 미 공군 대령과의 인연도 이때가 시작이었다.

한국 조종사들은 전투기로 작전에 나선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4대가 편대를 구성해 출격할 때 1번기와 3번기는 미군, 2번기와 4번기는 한국군 조종사가 탑승하는 형태였다.

훈련과 실전을 동시에 수행하는 최초의 한미 연합공중작전이었던 셈이다.

김 전 총장은 “F-51 지원을 위해 헤스 대령(당시 대위)이 이끄는 고문단이 왔는데 그때 처음 미군을 만났다”며 “헤스 대령과 20여회 작전하면서 어떻게 정찰을 하고, 어떻게 목표를 찾고, 어떻게 공격할지 방법을 훈련받은 것 같다. 나중에 편대장이 됐을 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김 전 총장은 1952년 1월 11일 금강산 일대 북한의 보급로 공습 임무 수행으로 한국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새겼다.

이후 베테랑 조종사의 풍부한 비행경험 전수를 기대한 공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후진 양성에 매진하다 정전을 맞았다.

전쟁 이후에도 주미 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을 맡아 북한의 미그-15에 대응해 F-5 전투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등 한미동맹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이와 함께 김 전 총장은 6·25전쟁 때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 공군을 향한 짙은 애정도 감추지 않았다.

그는 특히 현재 한창 개발을 진행 중인 한국형전투기 KF-21 보라매와 관련 “처음에는 솔직히 과연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며 “우리 손으로 만들어 제대로 전투기로 활용할 수 있을까, 미국이나 유럽이 만든 전투기와 어떻게 경쟁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였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지금까지만 봐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잘한 결정이었다”며 “우리 엔지니어들의 열정이 지금까지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보는데 참 고마운 일”이라고 말했다.

동남아와 중동을 넘어 폴란드 수출로 유럽 진출의 물꼬를 트고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경공격기 FA-50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지금 FA-50이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는데, 자체적으로 비행기를 만들지 못하지만 안보 위협이 크지 않고 지나치게 뛰어난 성능이나 고가의 전투기가 필요 없는 틈새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며 “앞으로 FA-50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뿐 아니라 자유진영의 자산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편 김 전 총장은 한미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된 데 대해서는 먼저 산화한 전우들에게 송구하다는 말로 소회를 대신했다.

“나는 내가 영웅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저 군인으로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에요. 나보다 먼저 전투에 나섰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영웅적인 분들도 많으니 그런 분들 중에서 뽑았으면 했는데 내가 뽑히게 돼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신대원·오상현 기자

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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