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추상대부 김환기’의 발자취

2023. 5. 1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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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단장 호암미술관 ‘김환기 회고전’
출품작 120여점 중 유화가 88점
도록·사진으로만 보던 작품 첫 외출
달항아리 이어 점·선의 추상까지
변화의 연속성 살펴보는 소중한 기회
호암미술관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 1부 전경. 가로 5.6m 크기의 대작 벽화 ‘여인들과 항아리’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발견된 작가 수첩(아래 사진)을 통해 제작 연도가 1960년으로 확인됐다. 수첩에는 ‘늦도록 벽화’ ‘오늘도 점심을 굼(굶)고 늦도록 벽화. 초조했든(던) 저녁’ 등 작품 제작 중 작가의 복잡한 심경이 적혀 있다.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삼성문화재단 제공]

김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사실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다.

132억 원.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로 기억되는 김환기의 ‘우주’(Universe 5-IV-71 #200)에 가려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삼성문화재단(이하 재단)은 오는 18일부터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김환기의 회고전 ‘한 점 하늘_김환기’를 개최한다. 전시작 120여점 중 유화만 88점이다. 최근까지 도판이나 사진으로만 볼수 있었던 작품도 나왔다. 명실상부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호암미술관 입장에서도 리모델링을 마치고 처음 개막하는 전시이자, 고미술 전문 미술관에서 벗어나 리움과 함께 국내외 현대미술을 선보이겠다고 밝힌 첫 전시이기도 하다.

호암미술관 전체를 활용하는 전시는 크게 2개로 나뉜다. 전시 1부는 작가의 예술 이념과 추상 형식이 성립된 193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작업을 선보인다. ‘달/항아리’라는 부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달을 닮은 백자대호(달항아리)를 사랑해 마지 않았던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김환기는 유독 달항아리를 사랑했다. 특히 푸른빛이 교교하게 흐르는 달밤 그 아래 놓인 달항아리는 그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한다. ‘백자와 꽃’(1949), ‘달과 항아리’(1952), ‘달과 매화’(1953-54), ‘달빛 교향곡’(1954)는 물론 전시작 중 최대 사이즈인 ‘여인들과 항아리’(1960)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김환기가 사랑했던 달항아리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다. 김환기가 달항아리를 아끼고 늘 곁에 두고 관찰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는 1955년 문예지 5월호에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있다...몸이 둥근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싸늘한 사기로되 다사로운 김이 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며 달항아리를 찬양하는 수필을 기고할 정도였다.

이처럼 기록으로만 있었을 뿐 대중들은 볼 수 없었던 그의 소장품 달항아리가 처음으로 이번 전시에 나왔다. 수필의 묘사처럼 푸른색이 살짝 도는 청백색의 이지러짐이 아름다운 백자대호다.

2부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추상 화가 김환기의 작업이 나온다. 50세, 홍익대 미술대 학장으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환기는 갑자기 학장직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떠난다. 그저 한 명의 작가로, 추상 회화로 당시 미술계의 중심이던 뉴욕에서 제대로 평가받고 싶다는 도전이었다. 1964년작 ‘야상곡’은 김환기의 새로운 시도가 담긴 작업이다. 2부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작품으로, 작가가 처음으로 나이프를 사용해 그렸다.

한국 전통을 현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작가는 뉴욕에서 처음 자신의 그림을 선보이고 크게 좌절한다. 뉴욕 평단에서는 그의 작업을 보고 ‘한국’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추상표현주의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이후 두터운 마티에르가 사라진다. 풍경의 요소도 점과 선으로 바뀌며 추상성이 커지고 점선면의 구성으로 바뀐다.

우리가 익히 아는 전면점화는 수많은 실험의 끝에 탄생했다. ‘점’은 그냥 단순히 하나의 도형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달과 달항아리, 고향의 바다와 산 등 고국의 모든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응축한 표상이다. 전면점화로 넘어가면서 김환기는 초기엔 가로로 점을 배열하다 이후 리드미컬한 운동성을 더한다. 132억원 낙찰로 유명해진 ‘우주’나 ‘하늘과 땅’(24-IX-73 #320), ‘산울림’(19-II-73#307)에서는 수 천개의 점들이 자유롭게 유영하며 관람객의 마음을 울린다.

전시는 김환기의 생애 마지막을 담아내며 끝난다. 붉은색부터 푸른색까지 생명의 찬란함을 찬양하던 점화는 점점 생기를 잃어 325번에 이르면 회색조와 검은색으로 변한다. 죽기 마지막 작업이던 338번 바로 앞인 337번 작업이 전시에 나왔다. 세로로 길게 이어진 점들은 경건한 느낌마저 준다. 1974년 6월 16일 김환기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새벽부터 비가 왔나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김환기는 한국 미술의 선구자이자 추상 미술의 대가로 꼽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전시엔 칼라도판으로만 전하던 ‘산’(1940년대 후반-50년대 초)을 비롯해 아예 처음 공개되는 ‘창’(1940) 등도 나왔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회고전이긴 하나 과거를 돌아보는 전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김환기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된 덕이다. 초대형 작품인 ‘여인들과 항아리’(1960)의 제작 연도가 확인됐고, 사진으로만 전하던 작품을 실물으로 발견했다.

그는 “연구자들에겐 김환기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 있고, 일반 관람객들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발전했다는 김환기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변화의 연속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른바 김환기 그 자체를 만날 수 있는 전시”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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