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셔틀 외교, 닥치고 반일·혐한 극복이 관건[홍영식의 정치판]

2023. 5. 16.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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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에 복원…韓, 위정척사 인식·채권자 의식에서 벗어나고 日은 남은 반잔 물 채워야

홍영식의 정치판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5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양국 관계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우리도 선진국처럼 용건이 있을 때 비행기 타고 상대국에 가서 회담하고 바로 돌아올 수 없느냐.”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참모들에게 한 말이다. 우리 정부는 2004년 2월 일본에 ‘셔틀(shuttle) 외교’ 의향을 전달했다. 일본이 호응하면서 1년에 한 번씩 양국 정상이 번갈아 가며 상대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간 첫 셔틀 정상 회담은 2004년 7월 제주에서 열렸다. 실무형 회담이어서 두 정상은 정상 회담, 공동 기자 회견, 만찬 등에 콤비 스타일의 간편 복장과 노타이 차림으로 임했다. 그해 12월 두 정상은 고이즈미 총리 부친의 고향인 일본 가고시마에서 하루 일정의 셔틀 정상 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2005년 10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셔틀 외교는 중단됐다. 

이후 한·일 셔틀 정상 회담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2008년 4월 21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가 일본 도쿄에서 정상 회담을 열고 양국 간 셔틀 외교 복원을 선언했다. 이듬해 1월 아소 다로 일본 총리가 방한했고 6월엔 이 대통령이 하루 짜리 일본 답방을 하는 등 몇 차례 셔틀 정상 회담을 열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로 양국 간 냉기류가 흘렀다. 이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2011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1시간 가까이 정상 회담을 했지만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종 평행선을 그었다. 이후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신사 참배 등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서 셔틀 외교는 멈춰 섰다. 2017년 7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가 열린 독일 함부르크에서 만나 셔틀 외교 재개에 합의했다. 이듬해 2월 아베 총리가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지만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를 거론하면서 실질적인 셔틀 정상 회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현충원·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탑 참배 큰 의미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3월 16일 1박 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상 회담을 한 것을 계기로 셔틀 외교 복원에 속도를 냈다. 두 정상은 새 시대를 열자며 경제안보협의체 출범,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완전 정상화와 대북 대응을 위한 안보 대화 재개 등 합의 사항들을 발표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해제하고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양국 재계 단체는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조성하기로 함에 따라 지난 3년 넘게 막혔던 경제 교류 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일본은 ‘화이트 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했던 조치를 취소하고 한국을 우대국으로 재지정한다고 발표하는 등 양국 관계 정상화를 위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5월 7일 서울을 답방해 윤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열면서 셔틀 외교는 다시 제 궤도에 올랐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셔틀 외교 복원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다. 윤 대통령은 “셔틀 외교의 복원에 12년이 걸렸지만 우리 두 사람의 상호 왕래에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며 “좋은 변화의 흐름은 처음 만들기 힘들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대세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이에 기시다 총리는 “3월 회담을 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벌써 다양한 대화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화답했다. 

두 정상은 셔틀 정상 회담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들을 내놓았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 총리로선 12년 만에 현충원을 참배했다. 두 정상은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 회의 도중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탑을 공동 참배하기로 했다. 한국 전문가 시찰단의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현장 파견, 일본의 단기 연수 프로그램 수혜 대상자 2배 확대, 반도체와 일본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공조 등에도 합의했다.

다만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한국이 먼저 반을 채운 물컵에 일본이 나머지 반을 채우는 데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기시다 총리는 과거사와 관련해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한데 대해 가슴이 아프다”고 하는 데 그쳤다. 그것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 방침이 아니라 개인의 뜻임을 분명히 했다. 다만 지난 3월 정상 회담 때 “역대 내각의 방침을 계승하겠다”고만 한 데서 한 발짝 나아갔다. 

韓 야당과 日 우익, 양국 미래 향한 발걸음 걸림돌

한·일 간 셔틀 외교가 다시 날아올랐지만 난관도 적지 않다. 역시 양국 모두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이다. 당장 한국의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3월에 이어 이번 한·일 정상 회담에 대해서도 비난전을 퍼붓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은 퍼 주기 굴욕 외교를 바로잡으라는 국민의 명령에 끝내 불응했고 한술 더 떠 일본의 식민 침략에 대한 면죄부 발언을 또다시 추가했다”며 ‘빵 셔틀 외교’라고 규정했다. “나라를 팔아넘길 기세, 안보를 팔아넘길 기세(서영교 최고위원)” “속국 외교 전락(장경태 최고위원)” “희대의 굴종 외교, 역사를 내다 판 대통령(강선우 대변인)” 등 비판이 꼬리를 물었다. 

상대가 있는 외교는 전승·전패는 있을 수 없고 ‘51 대 49 게임’일 수밖에 없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 양국은 의미 있는 결과물들을 내놓았는데도 민주당은 전패를 기록한 것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민주당은 대일 문제에서 정작 어떤 해법도 제시한 적이 없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4월 외신 기자 회견에서 징용 배상 제삼자 변제 방안을 비판하면서 대안에 대한 질문엔 “즉답할 수 있을 정도의 답이 있었다면 이 문제가 이렇게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해법이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한·일 협력은 경제와 안보를 위해 더 늦출 수 없는 과제이자 시대적인 사명이다. 야당이 책임 있는 정당이라며 구한말 위정척사식의 인식 틀, 반일 몰이 장사에서 벗어나 무엇이 진정 국익을 위한 길인지 조금이나마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해 우리부터 더 이상 채권자 의식에 붙잡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도 양국 관계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양국의 셔틀 외교가 가다 서다 반복한 것도 각기 자국 내 정치적 상황 때문인데 이번에 재개된 셔틀 외교의 성공과 지속 여부는 이를 극복할 수 있을지가 최대 변수다. 기시다 총리로선 우익의 혐한(嫌韓)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일본의 성의 있는 후속 조치도 관건이다. 한국이 물컵의 반을 채우면서 개문발차(開門發車) 했는데 일본이 호응하면서 남은 반잔의 물을 채워 나가고 있고 다 채울 몫은 역시 일본에 남아 있다. 

◆셔틀 외교란
‘셔틀(shuttle)’은 두 지역을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항공기나 기차·버스를 뜻한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에 성공한 뒤 상업적으로 항공 셔틀 운항을 처음 시작한 나라는 독일이다. 1910년 6월 프랑크푸르트와 인근 도시를 오가는 셔틀 노선을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항공 산업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셔틀 운항은 미국·영국 등으로 확대됐다. 1910년대 중·후반 미국 내 도시를 연결하는 노선들이 잇따라 생겼다. 

셔틀을 외교적으로 처음 쓴 사람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다. 1970년대 초반 중동전쟁 당시 키신저는 평화 협상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했다. 키신저는 자신의 역할을 ‘셔틀 외교’라고 이름 지었다. 양쪽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을 때 제삼자가 양쪽을 오가며 대화를 성사시키는 방식이다. 키신저는 3자 중재자의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지만 두 나라 정상이 의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할 때 수시로 상대국을 오가며 현안을 논의한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홍영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및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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