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체어맨』 폴 볼커 “물가전쟁 승리 위해선 고금리·긴축 확고하게 유지해야” [김용출의 한권의책]

“저는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밀러 의장이 유지해온 통화정책 기조보다 더 긴축적인 기조를 지지합니다.”

전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빌 밀러의 전화를 받고서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키가 거의 2미터에 이르는 그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날 만남은 짧게 끝났다.

당시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이던 폴 볼커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친구들에게 전화하면서 “연준 의장이 될 가능성을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그는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연준 의장으로 임명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란 혁명 이후 잇따른 석유파동과 달러화 약세로 인해 물가가 1년 만에 무려 13퍼센트나 오르는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이 미국을 휩쓸던 1979년 7월의 일이었다. 그는 상원 청문회를 거쳐서 다음 달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이때 그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밧줄 끝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미국 경제를 구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바야흐로 인플레이션의 전쟁이 시작됐다.

◆“권총 차고 다니면서 물가와 맞섰다”

금리를 인상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던 취임 열흘 뒤, 볼커는 곧바로 재할인율을 인상해 10.5퍼센트로 인상했다.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살인적인 물가상승은 긴축을 미룰 여유를 없앴다. 9월 재할인율을 인상한 그는 10월 다시 재활인율을 무려 1퍼센트포인트나 인상해 12퍼센트로 올리는 한편, 은행의 지급준비금 적립 비율을 확대하고 투기적 대출을 중지시키면서 통화 공급도 억제하기 시작했다. 시중금리는 21.5퍼센트라는 최고 수준을 뛰었고, 주택담보대출 금리 역시 18퍼센트를 상회했다. 미국 금융 역사에서 금리가 가장 높은 시기였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 금리를 올리고 통화 공급을 줄이면서 드라이브를 걸자, 불만과 저항도 커져갔다. 일부 농민들은 워싱턴으로 몰려와 연준 빌딩을 트랙터로 에워쌌고, 시민단체들은 여러 차례 연준 본부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심지어 무장한 남성은 연준 건물에 난입해 이사들을 인질로 삼으려 위협한 일까지 생겼다. 그는 1980년 12월 ‘개인 안전을 위한 호송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경호가 붙었고, 스스로 몸에 권총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그는 내부 구성원의 불안과 많은 사람들의 위협과 저항, 그리고 경기침체 우려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밀어붙였다. 금리를 어디까지 올려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는 그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다.

“당시 우리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기까지 금리가 얼마나 상승할지를 내가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지금 돌아봤을 때,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없었다. 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195쪽)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1982년 여름이 되자, 물가 상승률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이 뚜렷하게 하락 징후를 보이자, 그는 7월 재할인율을 인하하면서 통화 정책을 완화 기조로 전환했다. 미국 경제는 이후 건전성을 회복하면서 1990년대 찬란한 호황기를 맞았다. 볼커의 승리였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그의 투쟁은 미 연준에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중앙은행의 신뢰성은 한번 잃어버리면 되찾기 힘들다는 것. 강경한 전략을 철회하면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더 큰 부정적 결과를 불러서 결국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진실이었다.

“최고의 인플레이션 파이터”, “권총을 품고 다니면서 물가와 맞선 사람”, “미스터 체어맨(의장님)” 등으로 불리며 1980년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제어해 최고의 연준 의장으로 불리는 폴 볼커의 회고록 『미스터 체어맨-폴 볼커 회고록』(남민호 옮김, 글항아리)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중앙은행 독립 위해”...대통령 앞 침묵, 자리 나와

볼커는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미 연준 의장을 역임하면서 1980년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괴롭히던 인플레이션을 불과 몇 년 사이에 잡아낸 초긴축 통화 정책의 주인공이다. 2019년 작고. “인플레이션의 공포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지금,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는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의 말처럼, 인플레이션 전쟁기에 그의 책은 금융 및 경제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필독서다.

연준 의장으로서, 그는 인플레이션과 전쟁만 한 건 아니었다. 규제의 허점을 노린 금융상품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근시안적인 이익 추구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던 시기였다. 그는 퍼스트펜실베니아, 콘티넨털일리노이 등 여러 대형 은행이 파산할 때마다 효과적으로 대처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위해서 권력과 맞서기도 했다. 1984년 여름, 그는 백악관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의에 소집됐다. 그런데 회의 장소가 이상하게도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가 아닌 비공식 장소인 도서관이었다. 대통령은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고, 대신 비서실장이 대신 메시지를 전했다. “대통령께서는 대선 전에 금리를 인상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는 크게 당황했다. 마침 당시에는 긴축 정책을 펼칠 계획이 없는 데다가, 대통령이 연준에 명령을 내림으로써 분명한 월권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 나왔다고 회고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말 한마디도 없이 걸어 나왔다.”(197쪽)

◆브레튼우즈 종언 ‘닉슨 쇼크’ 현장 회고도

책은 1927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지방정부 공직자 아들로 태어난 볼커가 1952년 뉴욕 연방준비은행에서 활동한 이래 재무부 통화담당 차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연준 의장 등 30년 가까이 미국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 과정과 배경을 담았다.

연준 의장 전, 고정 환율제가 종료된 국제금융의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기도 했다. 재무부 차관으로서 1971년 8월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태환 일시 중단, 새 환율 수준 협상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조치를 준비하는 과정에 참석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사실상 변동환율 제도로 바뀌게 되는 이른바 ‘닉슨 쇼크’로 불린 경제 조치였다.

“1971년 8월 14일 토요일, 아마도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이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소집되었을 것이다. 주로 대통령 보좌관들과 경제자문위원회 위원들이었고, 예산국장 조지 슐츠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후로도 회의 내용을 비밀에 부칠 목적으로 우리는 외부세계의 소통을 차단당했다... 우리가 도착한 직후 에스펀관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회의 개요를 설명했고 코널 리가 회의를 이어받았다.”(124쪽)

연준 의장직을 내려놓은 뒤에는 세계은행 총재, 나치 희생자들의 스위스은행 계좌조사를 위한 위원회(ICEP) 의장 등 공적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복구하는 데 힘을 보탰다. 즉, 자신의 이름을 딴 ‘볼커 룰’을 담아서 대형 금융기관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법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다.

◆“프리드먼 통화정책은 순진하고 매우 잘못된 방향”

책에는 그가 뉴욕 연방준비은행 근무를 시작할 무렵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한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통화주의자에 대한 비판적 언급도 나온다. “통화 공급의 최적 증가율을 산출하고 그 준칙을 어떤 상황에서도 고수하라는 통화정책에 대한 그의 조언은 가장 좋게 말한다 해도 순진했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64쪽)

최고 등급을 받은 그의 프린스턴대 졸업논문 내용도 재미있다. 물가안정을 중앙은행의 핵심 목표로 공식 인정할 것과, 중앙은행을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호소하면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연준 의장을 미리 보는 것 같다.

그는 책에서 공직자들의 권한보다는 책임을 강조했다. ‘권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자리에 굳이 ‘책임’이란 단어를 썼다. 아울러 어떻게 하면 국민의 삶을 이롭게 할 ‘유능한 정부’가 가능할지 묻는다.

마치 볼커의 성격을 보여주듯, 책은 구성이나 문장 모두 꾸밈이 없이 단백하다. 그러면서도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나 연준 당시 대통령들의 모습, ‘닉슨 쇼크’ 등 내용은 진솔하다. 현대 통화시스템 형성에 기여한 한 비범한 인물의 회고록에 걸맞다. 세계 각국이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하는 지금, 인플레이션과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이들의 고민과 고독을 엿보고 싶다면 제격이다. 원제는 Keeping At It: The Quest for Sound Money and Good Government.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