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정일자·등기부등본… '국가 보증 문서' 믿을 수 없는 세상 됐다
[편집자주]수십 년 간 서민·중산층에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온 '전세제도'의 근간이 사라질 위기다. 사실상 무이자 사금융 시장인 전세는 사인 간의 신뢰가 기본이지만 확정일자와 등기부등본 등 국가가 보증한 여러 안전장치가 작동해왔다. 하지만 경제성장에 따른 부동산 자산 증가로 전세가 '레버리지(차입) 투자'에 이용되면서 전 재산과 다름없는 보증금 피해가 양산되고 고의적인 사기 수법으로까지 이용하는 상황이다. 제도의 허점을 노리거나 심지어 위조를 해 세입자를 속이는 신종 전세사기 유형이 다양화하고 있지만 2020년 기준 전세 가구 수는 325만가구로 여전히 전체 가구 수의 15.5%에 달한다.
◆기사 게재 순서
(1) 확정일자·등기부등본… '국가 보증 문서' 믿을 수 없는 세상 됐다
(2) 집주인이 몰래 세입자 주소 이전시킨 후 벌인 일
(3) '전세사기 폭탄', 아직 다 안 터졌다… "올 가을 위험 최고조"
(4) [Tip] "공제증서 100% 신뢰 안 돼, 신탁원부 확인"
#. 직장인 A씨는 전세계약 만기를 2개월 앞두고 새집을 구했다. 주거 수요가 많은 서울 강남이어서 신규 세입자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다고 판단, 만기 날짜에 맞춰 이사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현재 살고 있는 전셋집의 임대인이 신규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고 보증금도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차례 시도 끝에 통화할 수 있게 된 임대인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바쁜 사람이니 앞으로는 직접 전화하지 말고 관리인과 상의하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이후엔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이사 날짜에 쫓긴 A씨는 할 수 없이 살던 집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해놓고 새집으로 이사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이사해야 할 때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다. 이후 관리인은 새 세입자를 구하려면 임차권을 해제해야 한다며 A씨를 몰아붙이고 있다.
#. 수도권의 한 아파트에 전세로 살던 B씨는 지난해 어느 날 집으로 가압류 통지서가 날아온 것을 확인했다. 임대차계약 당시 확인한 등기부등본에는 임대인의 채무나 체납, 근저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자영업을 하던 임대인은 매출 감소로 신용대출을 받아 생활비를 쓰게 됐고 소득세도 체납해 결국 집이 담보로 잡힌 것이다. 임대인은 재계약 때 5000만원을 인상해주면 빚과 세금을 갚겠다고 제안했다. 전셋값이 하락하는 상황에 당장의 보증금 떼일 것이 두려워 임대인의 요구에 응해야 할까. B씨는 계약 전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했음에도 이후에 발생하는 일까지 세입자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경찰이 전세사기 수사에서 임대인의 보증금 미반환 사고에 '고의성'이 있었는지 여부를 사기죄 성립의 주요 변수로 보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고의성 여부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됨에 따라 경찰과 정부당국은 임대차계약 체결 당시 임대인의 재산 상황, 경제 능력 등을 사기죄 판단의 핵심 요소로 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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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임대인이나 공인중개사가 등기부등본의 '말소사항 포함'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위험거래일 확률이 여전히 높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이력이 있거나 계약 만기 이후에 보증금을 미반환했을 때 이를 참고하는 것은 임대인의 자금 능력이나 신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유효사항뿐 아니라 말소사항을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인중개사의 설명의무 소홀 등 사유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세입자가 등기부등본을 직접 열람할 수 있고 열람에 앞서 표시 내용을 선택하면 된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말소사항 정보를 의무제공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건물이 크거나 오래된 경우 이(말소사항)를 포함한 등기부등본이 수십장 수백장을 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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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신축빌라 전세계약 후 임대인 변경 '25건' ▲임대인의 개인회생 혹은 파산 신청 '10건' ▲세입자의 잔금 일정에 맞춰 대출 실행 '3건' ▲세입자에게 다른 주소로 전입신고를 요청한 후 대출 실행 '2건' ▲위조 서류를 이용해 대부업체 대출 '2건' 등으로 나타났다.
세입자는 부동산 정보 앱 등을 이용해 전세금액과 매매 시세를 비교해야 하고 세무서에서 임대인의 체납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전세가격 하락으로 최근 3개월간 서울 아파트 전·월세 거래 가운데 역전세(전세금이 매매가보다 높은 계약) 비중은 30%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프롭테크업체 '호갱노노'에 따르면 5월8일 기준 최근 3개월 동안 서울 역전세 거래 건수는 1만1613건으로 집계됐다. 2년 전 평균 전세가 대비 계약금액이 하락한 경우를 역전세 집계에 포함했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전·월세 거래량은 3만9340건이었다. 전체 거래의 30% 가까운 수가 역전세였던 셈이다.
자치구별로는 강동구가 1206건으로 가장 많고 송파구 1139건, 강남구 1020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서울 강동구 상일동 '고덕 아르테온' 전용 59㎡는 5월3일 5억원에 전세 재계약이 체결됐다. 이전 계약 때의 보증금보다 2억원 내린 금액이다. '고덕 롯데캐슬 베네루체' 전용 84㎡는 지난 4월 6억원에 신규 전세계약을 체결해 2년 전 대비 1억3600여만원 내렸다.
송파에선 집주인이 보증금 일부를 돌려주고 재계약을 체결한 사례가 있었다. 송파구 장지동 '위례신도시 송파 푸르지오' 전용 106㎡는 5월3일 종전 보증금 10억5000만원보다 1억원 내린 9억5000만원에 재계약이 체결됐다. 지난 4월에도 전용 106㎡ 전세금이 10억원에서 9억원으로, 전용 112㎡는 9억5000만원에서 8억5000만원으로 각각 1억원씩 내려 재계약을 맺었다.
부동산 침체기에 나타나는 역전세 현상은 결국 사회 비용으로 막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지난해 보증보험에 가입된 임대인이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은 보증사고 규모는 1조1731억으로 2021년 대비 83% 급증했다. HUG는 이 중 9241억원을 세입자에게 변제했다. 올 1분기 전세금 보증사고 건수는 7974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4분기(2393건)의 3배를 넘는 수준이다. 아파트도 올해 보증사고가 2253건을 기록했다.
보증사고는 세입자가 임대차계약 해지나 종료 후 1개월 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거나 계약 기간 도중 경매·공매가 이뤄져 배당 후 보증금 일부를 떼였을 때 집계된다. 임재만 세종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전세는 사기가 아니어도 보증금 미반환의 위험이 존재하고 집값이 내려가는 경우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며 "월세를 받는 형태라면 1000채를 가져도 이상할 게 없지만 전세를 낀 경우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수익이 안 되는 구조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세입자가 깡통전세임을 인지해도 무리하게 계약을 강행하는 이유는 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의 안전성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김노향 기자 merr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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