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조선 ‘왕의 계단’ 콘크리트 때려부어…궁궐유산 ‘테러’

노형석 2023. 5. 1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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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일제 전차 철로에 짓눌린 광화문 월대
계단 정중앙 깨뜨리고 잡석·콘크리트 타설
복원해도 일부는 남겨 역사 교육 활용해야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무지막지한 공사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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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했던 한 건축물이 테러와 학살을 당한 현장이었다.

조선의 임금과 대한제국 황제만이 궁궐 밖 세상을 나갈 때 거닐었던 월대의 장대한 계단과 돌길은 절반 이상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그 파편들 상흔에 잡석으로 뒤발려진 콘크리트가 마구 부어졌고 그 위에 다시 수백개의 육중한 철로와 침목이 놓였다.

지난달 25일 문화재청이 취재진에 개방한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 월대 발굴 현장은 전율을 일으켰다. 100년 전 일제가 조선 왕조의 존엄한 건축물에 자행했던 공간적 테러의 실상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여주었다.

광화문 앞 세종로 남쪽으로 48.9m를 나아가면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흔적이 적나라했다. 선로는 광화문 동쪽으로 휘어져 안국동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취를 그대로 남기고 있었다. 반대쪽으로는 효자동으로 꺾어지는 노선이 서로 와이(Y)자 모양을 이루면서 엇갈리는 형상이었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흔적이 적나라하다. 선로는 광화문 동쪽으로 휘어져 안국동 방향으로 나아간다.
광화문 앞에서 월대를 깔아뭉갠 선로 위로 전차가 주행 중인 모습. <동아일보> 1923년 10월4일치 지면에 실린 사진이다.

흔히 건축업계나 공사현장에서는 기초를 쌓기 위해 막잡석을 섞어 버리듯이 기초부를 다지는 콘크리트를 버린 공굴, 막공굴이라고 부르는데 일제 당국자들은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계단과 임금의 길을 이런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파괴하고 덮어버리면서 전찻길을 닦았던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9월부터 서울시와 발굴조사를 벌여 월대의 전체 규모(길이 48.7m, 너비 29.7m)를 확인했고, 임금의 길인 어도시설과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기단을 축조한 얼개 등도 확인했지만, 현장에서 이런 성과들 못지않게 도드라진 건 현재 지표보다 약 70㎝가량 아래쪽에 있는 월대 시설물에 1918~1923년 사이 가해진 폭력적인 침탈의 흔적들이었다.

앞서 전날 윤석열 대통령은 방미일정을 앞두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일본에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문제적 발언을 쏟아냈는데, 이에 반박하듯 일제의 공간적 만행이 자행된 궁궐 공간의 도드라진 흔적이 나타난 셈이었다.

구한말 광화문을 옆에서 본 모습. 왼쪽으로 삼군부 외행랑과 월대 난간석이 보인다. 전각 아래에는 작은 초소도 보인다.
1917년께 전차선로가 부설되기 직전 찍은 광화문과 앞 월대의 모습. 양옆으로 월대의 난간석들이 도열하듯 설치되어 있다.

이 치떨리는 궁궐유산 테러의 원흉은 바로 전차였다. 월대가 발굴된 세종로는 본디 서울에서 가장 넓고 큰길인 육조거리였다. 1917년 5월26일 경복궁 앞에서 한창 지반공사를 하던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공사에 들어갈 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해 먼저 화물수송용 전차 선로가 광화문 왼쪽 문으로 부설되면서 월대 권역은 훼철의 수난을 겪기 시작한다.

1918년 6월부터 광화문 사거리인 황토현에서 월대 앞쪽까지 승객을 수송하는 전차 운행이 시작됐고, 운명의 1923년 가을 경복궁에서 일제당국이 조선인 교화를 위해 단골수단으로 써먹던 박람회의 일종인 조선부업품공진회가 열리자 동원한 관객들을 실어나를 전차노선이 경복궁 서쪽을 끼고 돌아 영추문 효자동까지 부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월대는 일제가 타설한 콘크리트에 덮여 지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전차선로에 한세기 넘게 짓눌리는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 궁장이 떼어진 채 남아있는 동십자각과 짝을 이루던 서십자각이 전차선로에 밀려 철거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타설해 철로 기초부를 놓은 뒤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무지막지한 공사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달 25일 취재진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 발굴현장 남쪽 계단의 세부. 남쪽으로 돌출된 월대 어도 계단의 한가운데를 깨뜨리고 그 위에 잡석과 콘크리트를 붓고 바로 철로 침목을 놓은 단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날 공개된 현장은 인왕산과 북악산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선 광화문을 배경으로 월대와 그 옆 국방관청인 의정부 삼군부의 외행랑을 짓누르며 뻗어가는 두 전찻길, 그리고 1866년 고종의 경복궁 중건 이전까지 궁 바로 앞까지 다닥다닥 들어섰던 백성들 집 민가의 기초부 흔적까지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세기 반 전의 현장으로 들어온 듯한 감회를 느끼게 했다.

문제는 앞으로의 복원 방향이다. 일제의 공간 침탈상이 도드라진 선로에 짓눌린 월대 남쪽 돌출계단과 서쪽 기단 부분에 대해 문화재청은 일단 동쪽 편 기단과 계단과 대칭을 이루는 만큼 침목 등 선로 부분을 철거하고 월대를 온전하게 되살려 경복궁 복원의 취지를 살리겠다는 게 기본 방침이다.

가운데 어도 부분의 경우 일단 침목을 뜯어내고 그 아래 구조를 보고 세부 복원 방향을 문화재위원들과 논의해보겠다는 토를 달기는 했지만 월대의 100% 전면복원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공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듯이 현장이 주는 시각적 참상의 강렬함 때문에 선로 일부는 남겨 식민지 시절 폭압적 공간사를 일러주는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적지 않게 나오는 상황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정궁으로서 경복궁의 상징성은 물론 중요하다. 일제에 훼철된 월대의 온전한 복원도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절반 가까이 깨어져 사실상 새로 만들어야 하는 복원이 좀 더 국민에게 확실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유적이 일제의 전차 선로 아래 깨어진 생생한 단면 자체를 살리는 공존의 철학과 복원 디자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문화재청은 광화문 월대 유적 발굴 복원과 관련한 전문가 협의를 문화재위원회 궁능분과와 수리기술위원회 복원 분과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사안은 근대기 일제의 궁궐 공간에 대한 침탈사와 깊은 연관이 있고 토층의 보존상의 문제와도 떼어놓을 수 없다. 근대분과, 매장분과, 사적분과 등 다른 여러 분과 전문가들과의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복원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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