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을 말한다]⑥ 한국에선 몇 년만 버티면 라덕연도 돈 많은 회장님
형사처벌로는 한계… 과징금 등 행정제재 도입해야
시총 작고 공매도 제한적… 금융당국 권한도 적어
150년형. 지난 2009년 ‘폰지 사기의 제왕’으로 불리는 미국의 버나드 메이도프에게 내려진 형량이다. 그는 후속 투자자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주는 폰지 사기로 175억달러(23조원)에 달하는 피해액을 남겼다. 나스닥 증권거래소 이사장까지 지낸 월가의 거물은 지난 2021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 발 주가 조작 사태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내 증시를 둘러싼 여러 환경이 주가 조작을 유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과 같은 금융 선진국 역시 주가 조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국내처럼 작전 세력이 활개를 치지는 못한다. 높은 형량과 금융당국의 강력한 수사 권한, 형사처벌 외에 다양한 제재 수단 등이 작전 세력을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주가 조작을 주도한 의혹을 받는 라덕연 호안투자자문 대표는 지난 9일 검찰에 체포돼 수사를 받고 있다. 그는 시세조종과 미등록 투자일임업, 범죄수익 은닉 혐의(자본시장법·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를 받는다. 범죄수익 은닉이 형량의 하한이 가장 높지만, 징역 5년 수준이다. 대법원 양형기준을 적용해도 최대 15년 수준이다. 자본시장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세 혐의가 모두 입증돼도 최종 형량이 법정 최고형으로 구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답했다.
◇ 낮은 형량에 시세조종 부당이득액 산정도 어려워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불공정거래로 인한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형량은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이득액이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인 경우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벌금형의 경우 범행으로 얻은 이익의 3~5배로 계산한다.
문제는 부당이득액 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위반행위로 얻은 이익이 없거나 산정하기 곤란한 경우 벌금액의 상한액은 5억원이다. 이득액이 정확히 계산되지 않으면 법원은 ‘부당이득액수가 불명확한 경우 위반자에게 유리하게 산정한다’는 원칙을 따른다.
주가 조작으로 인한 거품이 터지면서 상장사 8곳의 시가총액은 8조원 넘게 증발했다. 주가 조작에 가담하지 않은 투자자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 기준에 따르면 300억원 이상의 이득액은 최대 징역 15년까지 양형 기준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잃은 돈이 모두 부당이득액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장을 지낸 김영기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2018년 작성한 논문 ‘자본시장 불공정거래범죄의 부당이득 산정기준’에서 “불공정거래범죄로 인한 부당이득액 규모를 정확히 계산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일정 기준에 따라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도록 실제 수치에 근접한 ‘추정 수치’를 계산해 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밝혔다.
자본시장법을 어겨 징역형을 받는 비중도 크지 않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 2021년 접수된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접수된 피의자 222명 중 징역형을 받은 경우는 57명으로 전체의 25%에 불과하다. 집행유예와 벌금형이 각각 26.5%, 21%의 비중을 차지했다. 징역형 비율은 2020년(35.9%)과 2019년(22.3%)에도 높지 않았다.
◇ 형사처벌로는 한계 명확… 과징금 등 행정제재 도입해야
라 대표가 같은 범죄를 미국과 같은 금융 선진국에 저질렀다면, 여생을 모두 감옥에서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미국은 유기징역의 상한이 없고,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겨 더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근본 형량도 강하고, 유기형의 상한도 없다”며 “게다가 병과주의를 택하고 있어 모든 혐의를 더하면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형량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높은 형량뿐 아니라 다양한 제재 수단으로 주가 조작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과징금 제도가 대표적인 불공정거래 제재 수단이다. 이 제도는 범법자에 대한 형사적 처벌보다는 법 위반 행위로 취득한 이익을 환수해 공평성을 확보하거나 법 위반 행위를 억제하고, 그러한 법 위반 행위에 대한 신속한 구제를 주된 목적으로 한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일본 금융당국은 이미 과징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국가들은 복잡하고 엄격한 형사절차보다 비형사적 규제가 효율적이기 때문에 과징금이 형사제재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밖에도 금융 선진국들은 ▲자본시장 거래 제한 ▲임원 선임 제한 ▲제재내역 공개 등의 제재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피 한 방울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7억달러를 끌어모은 엘리자베스 홈즈는 2016년 사건이 발생했지만, 여전히 1심이 진행 중이다”며 “경제·금융 사범을 형사 처벌로만 조치하려 하면 한계가 분명한 만큼 과징금 등 다양한 제재 수단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남부지검이 수사한 빗썸 실소유주 의혹을 받는 강모씨와 J사 사주 김모씨, H사 회장 등에 대한 판결 내용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횡령 및 배임 외에도 시세조종 혐의를 받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김모씨 등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을 경우 ‘역시 한국은 주가 조작은 범죄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겨 다른 M&A 세력들도 활개를 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시총 작은 기업 너무 많아… 금융당국 권한도 적어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증시가 주가를 조작하기 수월한 시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시가총액이 낮은 종목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적은 돈으로도 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 12일 기준 2712개의 상장 주식 가운데 시가총액이 100억원 미만은 89개, 500억 미만은 532개, 1000억 미만은 1149개에 달한다.
이번 주가 조작 대상이 된 상장사 8곳(대성홀딩스·선광·다올투자증권·다우데이타·삼천리·하림지주·세방·서울가스)도 시총이 적은 편이다. 본격적으로 주가가 오르기 전인 2021년 초 기준 8개 종목의 평균 시총은 3900억원 수준이다. 가장 시총이 적었던 종목인 선광의 경우 1800억원에 불과하다. 유통 주식 물량이 더 적은 점을 감안하면 주가 조작에 필요한 돈은 더 적다.
주요 국가들에 비해 금융당국의 권한이 적은 점도 이번 사태를 키운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수사 권한이 없다’는 사실이 금융당국의 안일한 태도를 불렀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의 경우,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증권 규제기관으로서 중심 역할을 한다. SEC는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 제재, 고발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 법 위반자에 민사·행정 제재를 가하고, 검찰에 통보해 검찰 기소로 형사 제재를 유도하기도 한다.
영국 금융감독청(FSA)은 시장남용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법적 조사권과 강력한 집행권한 및 광범위한 징계권을 갖고 있다. FSA는 조사를 위해 조사·금융범죄 부서를 두고, 규제결정위원회를 운영한다. 민사·행정 제재뿐 아니라, 독립적인 형사소추권을 갖고 있어 필요시 FSA가 직접 법원에 형사 기소를 할 수 있다.
프랑스 역시 금융시장청(AMF)이 금융시장 감독 및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 및 제재 권한을 갖는다. AMF는 불공정거래 행위자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하거나, 법원에 민사 제재를 청구할 수 있다. 일본도 금융청이 과징금이나 업무 정지 등 행정 제재 권한을 갖고, 법원에 부정행위 금지 및 정지명령 신청도 가능하다.
남 연구위원은 “금융 범죄는 금융당국이 전문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 SEC는 기소권을 갖고 있고, 영국이나 일본도 금융당국이 한국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며 “한국의 경우 금융당국 내 특법사법경찰 제도로 보완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똑똑한 증여] “돌아가신 아버지 채무 6억”… 3개월 내 ‘이것’ 안 하면 빚더미
- HLB 간암신약, FDA 임상시험 현장 실사 통과... “허가 가시권 재진입”
- 국민주의 배신… 삼성전자 미보유자 수익률이 보유자의 3배
- 특급호텔 멤버십 힘주는데... 한화, 객실 줄인 더플라자 유료 멤버십도 폐지
- “진짜 겨울은 내년”… 세계 반도체 장비 공룡들, 대중 반도체 제재에 직격타
- 오세훈의 ‘미리 내 집’ 경쟁률 50대 1 넘어… 내년 ‘청담르엘·잠래아’ 등 3500가구 공급
- 中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공개… 韓 ‘보라매’와 맞붙는다
- 배터리 열폭주 막을 열쇠, 부부 교수 손에 달렸다
- 사람도 힘든 마라톤 완주, KAIST의 네발로봇 ‘라이보2’가 해냈다
- '첨단 반도체 자립' 갈망하는 中, 12인치 웨이퍼 시설 설립에 6조원 투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