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 상권 성수, 모든 것이 모이는 곳[상권 리포트⑥]
[편집자주]오래되다 못해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회색빛 동네, 젊은 창업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저렴한 임차료, 서울 중심부라는 편리한 교통, 신도시에 질린 젊은이들이 구도심으로 눈을 돌리는 트렌드까지…. 네 가지 요소가 모이면 뜨는 동네의 성공 방정식이 된다. 사람이 몰린 곳에는 곧 자본도 몰린다. 자본이 덮친 거리는 임대료가 오르고 이를 버티지 못한 1세대 예술가들이 떠나며 곧 도시의 특색도 사라진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예술과 자본의 함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을 목격한 뉴욕의 유명한 미술가인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는 뉴욕 예술가들을 ‘미생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지저분한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것들을 다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해 놓으면 땅값이 올라 또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의 골목들도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할 서울의 다음 거리는 어디일까.
서울 성수동 거리는 매달 새 옷을 갈아입는다. 다양한 업종, 각양각색의 브랜드 팝업스토어(임시 매장)가 일정한 간격으로 문을 열면서 성수동의 변화를 이끈다. 성수동에서 만난 30대 직장인 홍서연 씨는 “성수동은 매주 와도 늘 다른 팝업스토어가 열려 구경하는 맛이 있다”며 “인스타그램에서 힙한 브랜드는 모두 성수에 한 번쯤 팝업스토어를 연다”고 말했다.
모든 ‘길’에는 역사와 시간이 녹아 있다. 세월의 풍파를 거쳐 자기 색깔이 분명해진 ‘길’에는 사람이 몰린다. 사람이 가는 곳엔 자본이 따라간다. 자본의 파고는 길을 번영하게 하기도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인상 등으로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라는 아픔을 낳기도 한다. 자본만 남은 거리는 어느 순간 특색이 사라지고 그 ‘길’은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혀 간다. 물론 그러다 다시 뜰 수도 있다.
성수동의 길도 뜨기까지 서사가 있었다. 12년 전 젊은 예술가들이 서울 성수동 골목에 몰려들었고 공장과 주택이 뒤엉켜 있던 회색빛 거리에 서서히 색깔이 입혀졌다. 골목골목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에는 개성 넘치는 가게들이 둥지를 틀었고 거리 사이사이에 대기업의 팝업스토어가 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청담동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명품과 디자이너 브랜드 등 패션 뷰티가 성수동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소셜 벤처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기업도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람과 자본으로 거리가 채워지고 있다.
하지만 어느 거리와 결과는 달랐다. 성수동의 길은 젠트리피케이션에도 굴하지 않고 골목길 특유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골목 거리를 지키기 위한 정책이 있었고 4만 명이 넘는 든든하 배후 수요와 강남·압구정과 이어지는 도로, 서울숲·한강 등 사람들을 끌어오는 녹지와 수변이 있었다. 색깔이 뚜렷한 거리에는 신세대와 기성세대, 외국인 관광객 등이 뒤섞여 북적이는 모습이다. 한국 상권의 ‘미래’인 성수동 거리를 살펴봤다.
◆팝업의 성지 성수
자동차 정비 공장과 인쇄 공장이 즐비했던 성수동 거리가 맵시 있고 매력적인 동네로 바뀌고 있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장과 공장 사이 갑자기 카페가 나타나고 허름한 공장 건물 위층에는 가구 갤러리가 들어선다. 성수동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이색 카페에 예술 전시와 공연이 이어지면서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연무장길은 지하철 2호선 뚝섬역부터 성수역을 지나 성수사거리에 이르는 긴 골목이다. 1970~1980년대 이 거리는 수제화 업체들이 주름잡았다. 금강제화·에스콰이아·엘칸토 등 한국 3대 구두 브랜드의 생산 공장이 있던 곳이였다. 하지만 중국의 값싼 제품들에 밀려 2010년 무렵부터 많은 업체가 떠났다. 그 대신 카페·식당·잡화 상점 등 2030세대들이 선호하는 가게들이 속속 자리 잡았다.
최근 부동산업계가 ‘뜨는 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팝업스토어’다. 4월 27일 점심 찾은 성수 거리에는 건물 곳곳에 허물고 지어지는 상점이 보였다. 크고 작은 팝업스토어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에서 휴대전화로 ‘인증 샷’이나 브이로그 영상을 찍는 젊은이와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디올 성수’ 앞에는 특히 사람들이 붐볐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이 지난해 5월 문을 연 팝업스토어 ‘디올 성수’는 파리 몽테뉴가 30번지에 있는 매장을 그대로 재현한 외관으로, 성수동의 빼놓을 수 없는 사진 명소가 됐다. 디올 측은 원래 지난해 11월까지 팝업스토어를 운영할 예정이었지만 반응이 좋아 운영 기한을 연장했다.
명품 3대장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도 이미 성수동에 쇼룸과 팝업 스토어 등을 거쳐 갔다. ‘청담=명품거리’ 공식이 깨지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4월 성수 카페거리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패션 디자이너 편집숍 수피의 공간을 4월 20일부터 30일까지 열흘간 임대해 행사를 진행하는 형태였다. 현대차 관계자는 “젊은 세대들에게 홍보하기 좋아 (성수를) 선택했다”며 “평일에는 500~700명 정도, 주말엔 2000명 이상이 방문했다”고 말했다.
다른 브랜드의 팝업스토어도 성수의 거리에 문을 연 이유는 같았다. 방문객의 숫자도 비슷했다. 롯데칠성음료의 ‘밀키스 구름 하우스’ 팝업스토어에는 하루 700명 이상이, 배상면주가의 느린마을 팝업스토어에는 열흘간(4월 28일~5월 7일) 1만 명이 방문했다. 배상면주가는 ‘아재술(아저씨술)’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플래그십스토어(주력 매장)도 곳곳에 보였다. 연무장길에서 카페거리로 넘어가다 보면 샛노란 ‘노티드’ 도넛 브랜드로 장식된 GS25의 도어투성수(DOOR to seongsu)를 볼 수 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도어투성수는 편의점업계 최초의 플래그십 브랜드다. 동네 GS25에선 구할 수 없는 디저트나 노티드 한정 판매 상품과 굿즈 등이 진열돼 있다.
체험을 제공하는 아모레퍼시픽의 아모레 성수는 2019년 오픈한 이후 광고 등 마케팅을 크게 한 적이 없다. 아모레 성수의 독특한 콘셉트와 인테리어를 경험한 이용객들이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며 자발적으로 홍보했다. 효과는 좋았다. 월평균 1만 명 정도의 방문객이 다녀갔고 외국인 관광객(2022년 누적 기준)도 5000명 이상 다녀갔다.
주말(5월 7일)에도 방문해 봤다. 이번엔 서울숲부터 시작해 성수역으로 이동했다. 평일 성수의 거리에 직장인과 대학생들이 북적였다면 주말에는 커플과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거리를 채웠다. 115만7025㎡(35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 생태공원(서울숲)이 가족 단위의 소비자를 끌어당겼다. 서울숲은 2005년 개장 이후 해마다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서울숲을 방문한 이들은 서울숲 북쪽과 맞닿은 성수동 골목길(아틀리에길)의 공방과 카페 등을 찾아간다. 서울숲 집객 효과다.
서울숲 정문에서 길 하나 넘어 자리한 언더스탠드에비뉴도 북적였다. 이곳은 지상 1~3층 높이의 컨테이너 116개로 구성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성동구가 청년 창업가와 사회적 기업 등에 공간을 내줬다. 제품 판매 공간뿐만 아니라 문화 전시 공간, 카페와 식당도 들어서 있다.
이날 중앙 컨테이너에는 SM 팝업스토어(NCT)가 자리 잡았는데 여성 방문객들로 꽉 차 있었다. 식료품점으로 꾸민 공간에서 NCT 각 멤버의 특징을 반영한 가상의 식품 브랜드 아트워크와 소품이 진열돼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는 2021년 성수동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바로 옆에 있는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팝업 행사를 진행한 셈이다.
골목길에서 만난 김현(30대) 씨는 성수 상권에 대해 ‘복합 쇼핑몰’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성수에는 식당과 카페만 있는 게 아니다. 밥을 먹고 레어로우 하우스 같은 가구점을 들르고 소품 숍에 머무르다 라이프스타일 숍을 방문하고 브랜드 팝업스토어를 투어한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성수에 머무르게 되는 록인 효과(잠금 효과)가 발생한다는 얘기다.
박예은 나이스지니데이타 연구원은 “성수동은 음식점‧카페뿐 아니라 소매‧유통 업종의 매출도 승상하고 있고 플래그십 및 팝업스토어가 문을 열며 상권의 다양성을 높이고 있다”면서 “다방면의 리테일 콘텐츠가 계속 수요를 충족하고 있어 (성수 상권은) 앞으로도 상승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숫자로 본 성수 거리
연무장길에 있는 동구식당 점장 김성수(40대) 씨는 요새 일할 맛이 난다고 말한다. 그는 “디올 쇼핑백을 들고 방문하는 손님이 늘었다”고 콧노래를 불렀다.
한식에 막걸리가 주메뉴인 동구식당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칼국수·메밀면 등의 점심 장사를 시작했다. “점심에는 사장님이 영업을 한다. 30~40명 정도 방문하는데 코로나19 사태가 풀린 후 외국인 손님들이 잡지를 보고 찾아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66㎡(20평) 남짓한 가게에는 테이블이 13개 있었다. “평일 저녁엔 평균 두 번 회전한다. 간혹 세 번 돌 때도 있는데 이때 장사하는 재미가 있다”면서 “평일이나 주말 매출은 비슷하다”고 했다. 주중엔 직장인들이 법인카드로 먹는 경우가 많아 객단가가 높은 데 주말엔 손님이 많지만 객단가가 낮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 하나에 막걸리 한 병 먹으면 2만60000원 정도다.
성수 거리의 매출은 우상향이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성수역 상권의 월평균 매출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2020년(378억원)을 제외하곤 성장세를 보였다. 2021년(월 464억원) 코로나19 사태 이전인 2019년(월 402억원) 수준을 웃돌았다. 2022년(월 569억원), 2023년 1분기(월 622억원) 역시 상승세를 이어 갔다. 1년마다 10~20%%씩 상권이 성장한 셈이다.
서울숲 상권은 아예 코로나19 사태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2019년 월평균 매출은 256억원, 2023년 1년 월평균 매출은 430억원으로 조사됐다. 4년 만에 상권이 2배 가까이 커졌다.
두 상권 모두 식당·카페가 매출 상승을 이끌었다. 성수역의 식당·카페 등 음식점 매출(약 298억원)은 작년 대비 71%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서울숲의 식당·카페 등 음식점 매출은 60% 이상 성장했다.
상권이 성장하면서 공실률은 떨어졌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0년 1분기 4.2%였던 뚝섬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2023년 1분기 2.4%를 기록했다. 이는 서울 전체 상권 평균인 16%를 크게 밑돈다. 오피스도 마찬가지다. 상업용 부동산 빅데이터 기업 알스퀘어에 따르면 2022년 3분기 기준 성수권역 오피스 공실률은 0.5%로 파악됐다.
부동산 값은 요동친다. 뚝섬역 사거리에서 서울숲역·성수역까지 이어지는 대로변은 평당 2억원, 이면 지역은 1억6000만원 이상으로 땅값이 형성돼 있다. 이것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부동산 관계자는 말했다.
아파트 값도 올랐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성수역 인근 우성2차 아파트(전용 면적 84.39㎡)의 매매 가격은 2019년 7억4000만원에서 2021년 10억원으로 35% 뛰었다. 같은 기간 서울숲 인근 동아아파트(전용 면적 96.18㎡)는 13억5000만원에서 14억1500만원으로 5% 가까이 상승했다.
고급 아파트의 공시 가격도 올랐다. 부동산 공시 가격 알리미를 보면 올해 1월 기준 아크로서울포레스트의 최고층 전용 면적(273.928㎡) 공시 가격은 81억9300만원으로 전년(75억8700만원) 대비 6억원 이상 올랐다. 서울 평균이 17.3% 떨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법
물론 임대료도 상승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2019년 3.3㎡당 15만원이던 서울숲 인근 상권의 임대료는 2022년 22만원이 됐다. 같은 기간 성수역 역시 14만원에서 19만원으로 올랐다. 3년 만에 각각 46%, 35%씩 상승한 셈이다.
다만 강남권 주요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덜 올랐다고 평가된다. 성동구가 이 일대를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묶고 적극적 대응에 나서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비켜 갈 수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 대책은 2015년 성동구가 전국 최초로 관련 조례를 제정한 정책이다. 2016년부터 서울숲길·방송대길·상원길 일대에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업체가 입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특색 있는 소규모 업체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건물주와 협약을 맺고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는 등의 조치도 취했다. 건물 외벽에 ‘상생성동’이라고 써 있는 둥근 푯말을 붙이는 식이다. 자연스레 개성과 경쟁력을 갖춘 소규모 점포들이 늘어났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성동구는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성수역과 연무장길로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 연무장길을 중심으로 권리금과 임대료가 급상승세를 보이고 있어 이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성동구청 관계자는 “올해 9월 정책 적용 지역을 발표하고 공청회·성명서 발표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용적률 완화(상생 협약 건물주 대상), 대기업 입점 제안 등 세부적인 계획안은 2024년 6월께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임대료 대신 관리비를 올려 결국 임차인이 느끼는 총 비용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 같은 허점들도 보완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팝업스토어 제한에 대해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팝업스토어는 베뉴(장소)에 따라 하루 임대료가 수천만원에 달하는 곳도 있어 주변 월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최근엔 전담 대행사도 따로 생겼다. 구 관계자는 “팝업스토어는 법 제한을 받지 않고 인허가 절차가 없어 높은 임대료로 거래가 되고 있다”고 설명하며 앞으로도 면밀히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소규모 공장지대는 젊은 창업들에 의해 힙한 동네가 되고 이는 기업과 명품 업체를 불러들이는 선순환을 보여준 성수. 여기에 정책의 힘까지 더해지며 한국 최고의 상권으로 인정받기 직전의 순간에 와 있다. 그 정점을 찍을 이벤트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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