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1호 유권자’ 의원 보좌진
총선 이튿날 ‘영감’이 보좌진을 소집했다. 영감은 여의도에서 보좌진이 자신이 모시는 국회의원을 부르는 은어다. 어려운 선거였지만 다행히 신승이었다. “고생했다” “휴가 다녀와라”. 이런 상투적인 말이 나와야 하는 상황, 영감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 때문에 대승해야 할 선거에서 신승했다는 질책이었다. 그리고 보좌관 몇몇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분함, 배신감, 억울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한 보좌관은 “평생 가져온 정치 지향성까지 회의하게 됐다”고 했다.
이 영감처럼 해고만 하면 양반 축에 속한다는 게 여의도 정설이다. 자신이 자른 보좌관 재취업을 막기 위해 의정활동 시간을 쪼개 다른 의원에게 전화를 돌리는 경우도 있다. ‘실업 청탁’이다. 연락을 받으면 의원들끼리 관계 때문에 해고된 보좌관을 채용하기 어렵다.
국회의원 보좌관은 파리 목숨이다. 고용주가 ‘롸잇 나우’ 실업자를 만들 수 있다. 요즘에는 e메일이나 카카오톡으로 ‘해고통지서’를 보내는 비정한 경우도 있다. 합당한 사유 제시는 필요 없고, 결정은 의원의 ‘소신’이다. 지난해 면직 30일 전 통보 제도가 신설됐지만 무용지물이다. 해고에 맞서 싸우려면 여의도판을 영원히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 참다못한 한 보좌관은 의원에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사자후를 토한 뒤 여의도를 등졌다.
그래서 오늘도 슈퍼 ‘갑’ 의원의 보좌진에 대한 갑질 사례는 ‘여의도 지하통신’을 떠돈다. 주 69시간제를 반대하고 인권을 부르짖는 한 의원은 보좌진을 월화수목금금금에 출근시킨다. 이분은 주말 일정에 꼭 보좌진 거의 전부를 대동한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한 의원은 보좌진과의 대화를 주로 욕설로 시작한다.
보좌진의 불안정 노동은 임면권을 의원 1인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주인 의원이 ‘4년짜리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의 비정규직’이 고용 안정성을 누리긴 힘들다. 정치 양극화도 일자리를 위협한다. 과거에는 능력만 되면 여야를 넘나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중간첩’으로 몰릴 수 있다. 의원과 보좌진 관계 변화도 직업 안정성에 영향을 준다. 과거에는 ‘정치적 동지 관계’가 미약하게나마 있었지만 지금은 ‘회사원형’ 의원과 ‘생계형’ 보좌진이 상당수다.
만년 비정규직 신세지만 베테랑 보좌관은 한국 정치판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여러 국회와 선거를 거치면서 정책 이해도가 높고, 정무 감각도 뛰어나다. 대언론 관계도 의원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 산전수전을 겪은 덕에 ‘관종형’이 대부분인 요즘 초선 의원보다 덜 극단적이다. 그래서 실력 있는 보좌진 구성은 좋은 정치인의 필수 요건이다. 경험상 훌륭한 정치인 곁에는 항상 훌륭한 보좌진이 있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좌진은 의원의 ‘1호’ 유권자라는 점이다. 모든 의정활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본다. 그들은 의원의 비서이면서 동시에 의원의 인성, 지성, 이중성에 대한 1심 판관이다. 그런 점에서 구사일생한 태영호 의원의 정치 운명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태 의원은 그를 가장 잘 아는 유권자들에게 이미 심판을 당한 셈이다. 보좌진에게 욕먹는 의원치고 잘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강병한 정치부 차장 silverm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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