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내 40년 보물은 까치... 마음에 안 들던 원화, 존재감 더해가”
올해는 대한민국 수립 75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보물(寶物)을 발굴한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에도 개인의 기억과 현대사의 한 장면이 깃들어 있다. 올해 ‘공포의 외인구단’ 발표 40주년을 맞은 만화가 이현세가 ‘보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시절의 젊음은 폭발 직전이었습니다. 까치라는 반항아가 등장하자 청춘은 둑이 터지듯 열광했지요.”
서울 개포동 화실에서 최근 만난 만화가 이현세(69)는 올해 40주년을 맞은 대표작 ‘공포의 외인구단’(1983) 발표 당시의 시대상을 이렇게 회상했다. 프로야구판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들의 반란을 그린 이 작품이 군사정권 아래서 숨죽이던 독자들에게 대리 만족을 줬다는 일부 해석에 대해 얘기할 때였다. 이현세는 “꼭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젊은이들은 작은 반항과 일탈에도 목말랐던 것”이라고 했다.
◇억눌린 젊음에 숨통 틔워준 ‘까치’
‘외인구단’ 탄생 배경엔 군사정권의 스포츠 진흥책에 따라 한 해 앞서 출범한 프로야구가 있다. 이현세는 “이제 프로야구가 생겼으니 그거로 ‘어른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고 민기(외인구단 스토리 작가 김민기)와 의견을 모았다”면서 “돈이 오가는 프로 세계는 그때까지 아마추어 스포츠 만화가 그렸던 사랑, 우정, 도전, 승리와는 전혀 다른 소재였다”고 했다. 대본소(貸本所)라고도 했던 만화방은 1970년대까지 어린이들의 문화 공간에 가까웠다. 완결이 빠른 3~5권짜리 명랑 만화가 많았다. ‘외인구단’도 4권을 목표로 시작했다가 폭발적 호응에 힘입어 30권으로 완결했다. 장편 극화체(성인 대상의 사실적 만화) 작품이 만화방의 대세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사회 정화’를 내세운 당시 정권은 창작물을 엄격하게 검열했다. 만화는 특히 심했다. “전쟁 만화에서 국군이 정체성 혼란을 겪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라도 하면 그건 바로 ‘남한산성감’이었죠.” 외인구단 역시 ‘분위기를 너무 어둡지 않게 하라’는 요구에 맞춰 인물의 눈 아래 그림자를 옅게 수정하는 등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만 검열관도 애독자가 돼서 다음 편을 기다리느라 통과시켜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만화계에 전해진다.
‘외인구단’ 발표 이후 어느 날 주인공들을 따로 그려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인물 표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가 “분위기가 좋다”며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었다. 이현세는 “버리려던 그림이 10년, 20년 지나자 희한하게도 점점 존재감을 뽐내더라”고 했다. 그 세월 동안 까치는 곧 이현세였다. “까치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수없이 했죠. 안 되더라고요. 까치가 안 나오면 독자들은 이현세 만화가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삼국지를 그려도 조자룡의 헤어스타일은 결국 까치가 되고…. 내가 만든 캐릭터지만 끝내 까치를 이기지 못한 거죠.”
◇투쟁 끝에 얻은 표현의 자유
민주화 이후에도 전면적 표현의 자유는 쉽게 허용되지 않았다. 1998년 2월 검찰이 그를 미성년자보호법 위반 혐의로 약식 기소했다. “한국에서 나만큼 다양한 소재로 그린 사람은 없을 것”이라 자부하는 이현세가 한국 상고사(上古史)를 소재로 내놓은 ‘천국의 신화’ 일부 장면이 음란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1심에서 법원은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출판사는 벌금을 냈으나 이현세는 항소했다. 2001년 2심은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1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벌금을 낸다는 건 죄를 인정하는 거잖아요. 죄의 유무를 끝까지 가리지 않고 그냥 승복해 버리면 후배들도 비슷한 일을 계속 겪게 되겠죠. 그 고리를 누군가는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심 판결이 나온 뒤 친분이 있던 일본 만화가들이 축하와 응원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마 과장’의 히로카네 켄시, ‘내일의 죠’의 지바 데쓰야 등 18명이 각자의 캐릭터와 메시지를 모았다. ‘무죄 승리 축하합니다’를 비롯한 한글 메시지, ‘正義は勝つ 表現は自由(정의는 이긴다 표현은 자유롭다)’처럼 일본어로 적은 메시지엔 국경을 뛰어넘은 창작인의 동료애가 담겨 있다. 미성년자보호법이 위헌 판결을 받고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면서 재판은 마무리됐다.
◇”인터넷 만화, 위기이자 기회”
‘박기정 신작’ 포스터가 붙은 만화방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 화실 창가에 놓여 있었다. 만화책을 자전거에 싣고 오는 외무(만화방 종업원)를 기다리며 서성이던 어린 시절 추억을 그려봤다고 했다. “아침마다 만화방 앞에서 기다렸거든요. 박기정 선생님 신작을 제일 먼저 보고 학교 가서 얘기해야 되니까.” 박기정(1937~2022)은 명사 캐리커처로 유명한 시사만화가이자 ‘도전자’ ‘폭탄아’ 같은 단행본 만화의 대가였다. 그가 어린 이현세를 만화 세계로 인도한 셈이다.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문하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이현세에겐 스승 같은 존재였다. “6년 전 식사 자리에서 ‘나는 이제 쓸 일이 별로 없다’고 하시면서 평생 쓰시던 몽블랑 볼펜을 주셨어요. 바라보고 있으면 선생님이 보고 계시는 것 같죠.”
이현세는 “습작 시절엔 미군들이 버린 책을 모아 팔던 명동 책방에서 미국 만화책을 구해 보며 인체 묘사를 익혔다”고 했다. 근육질의 배트맨과 수퍼맨이 그의 교본이었다. 음영을 많이 쓰는 다른 미국 작가들에 비해 선(線)이 섬세한 DC코믹스 작화가 닐 애덤스(1941~2022)를 특히 좋아했다. 2012년 미국에 갔을 때 그를 찾아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애덤스는 작품집에 서명을 넣어 선물로 보내왔다고 한다.
1978년 ‘저 강은 알고 있다’로 데뷔하고 이듬해 결혼했다. 아내도 그림 그리는 애니메이터였지만 여자는 결혼하면 일을 그만두는 게 당연시되던 때였다. 결혼하면서 아내는 작업용 펜홀더(연필깍지)를 선물로 줬다고 한다. “몽당연필을 볼펜 대에 끼워 쓰던 그때는 꽤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자기 몫까지 그려달라는 의미로 준 거겠죠. 지금까지 만화가를 하고 있으니 그때 약속은 지켰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의 데뷔 시절과 지금 만화 시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그가 “인터넷 대본소”라고 말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고 글로벌 시장이 형성됐다. 이현세는 이런 변화를 위기이자 기회로 봤다. “시장이 커지니 자본이 투입되고 만화에도 영화처럼 대형 기획사가 등장했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경쟁하는 독립 영화처럼 만화가도 작가로서 경쟁하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대형 기획사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로맨스 판타지나 좀비물처럼 몇 가지 검증된 장르에만 집중합니다. 그 사이에서 대박을 치는 건 독특한 스토리로 무장한 ‘오리지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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