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韓과 제대로된 화해 못해… 가해인정-보상-사과 확실히 해야”
히로시마=이상훈 특파원 2023. 5. 16. 03:01
‘한국인 원폭 위령비’ 1999년 평화공원에 옮긴 히라오카 前히로시마 시장
차별-인권침해 없어야 진정한 평화
한국인 위령비 시장 직권으로 옮겨… 시장 재임때 식민지배 공식 사과도
尹대통령-기시다 총리 공동참배… 원폭 피해자들에 빛이 비치는듯
차별-인권침해 없어야 진정한 평화
한국인 위령비 시장 직권으로 옮겨… 시장 재임때 식민지배 공식 사과도
尹대통령-기시다 총리 공동참배… 원폭 피해자들에 빛이 비치는듯
19∼21일 열리는 일본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간 중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함께 참배할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는 재일동포의 아픈 역사가 담겼다. 원폭 투하 25년 만인 1970년 히로시마에 위령비가 세워졌지만, 일본의 차별 정책과 남북 분단에 따른 재일동포 사회 내 갈등으로 오랫동안 원폭 피해를 기리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방치됐다.
1999년 한국인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기는 결정을 한 히라오카 다카시(平岡敬·96) 당시 히로시마 시장은 그렇기에 누구보다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가 감개무량하다. 그는 15일 히로시마에서 진행한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일본은 그간 원폭 피해자에게 냉랭했고 특히 한국인 피해자를 무시했다”며 “이들에게 빛이 비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 “위령비 공원 밖 방치는 차별” 결단
히라오카 전 시장은 재임 중인 1999년 시장 직권 특례 조치로 한국인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으로 들여왔다. 그는 “(한국인 위령비를) 방치하면 언젠가 외교 문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애초 위령비는 고종 손자인 이우 공이 원폭으로 숨진 지점에 설치됐다. 하지만 이후 공원 밖에 위령비가 있는 것은 한국인 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처음 히로시마시 측은 ‘공원 내에 이미 많은 추모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이전에 난색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히로시마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의 편지는 히라오카 전 시장이 이전을 결단하는 계기가 됐다. ‘왜 한국인 위령비는 공원 밖에 있나요’라는 편지를 읽으며 히로시마가 ‘분노의 땅’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없는 것만 평화가 아니다. 차별, 인권 침해 등이 없어야 진정한 평화라는 사명감으로 추진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입은 원폭 피해를 들어 ‘전쟁의 피해자’라는 입장만 부각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은 원폭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제국주의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나도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역사를 배웠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日, 한국과 제대로 된 화해 못 해”
1927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사업을 한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흥남, 서울 등에서 살았다. 경성제대 예과에 잠시 다니기도 했다. 히로시마 지역 신문인 주고쿠(中國)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일본 언론 최초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기사화했다.
히로시마 시장은 1945년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에 맞춰 매년 평화선언을 발표한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1991년 취임 후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 태평양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문구를 평화선언에 넣었다. 일본 정치인으로서 식민지배에 대한 첫 공식 사과였다. 우익 세력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꼈지만, 용기 있는 그의 선언은 중앙정치를 움직이고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바꿨다. 그가 심은 씨앗은 현직 총리로 식민지배를 처음 공식 사과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식민지배에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이어졌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이 아직 한국 등 아시아와 제대로 된 역사 화해를 못 했다”고 지적했다. “피해 끼친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명확히 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사과와 맹세를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화해의 세 가지 조건이다. 기시다 총리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두고 “마음이 아프다”며 개인적 유감을 표한 것에 대해서도 “안 한 것보단 낫지만 국가로 제대로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아쉬워했다.
1999년 한국인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옮기는 결정을 한 히라오카 다카시(平岡敬·96) 당시 히로시마 시장은 그렇기에 누구보다 한일 정상의 공동 참배가 감개무량하다. 그는 15일 히로시마에서 진행한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일본은 그간 원폭 피해자에게 냉랭했고 특히 한국인 피해자를 무시했다”며 “이들에게 빛이 비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 “위령비 공원 밖 방치는 차별” 결단
히라오카 전 시장은 재임 중인 1999년 시장 직권 특례 조치로 한국인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으로 들여왔다. 그는 “(한국인 위령비를) 방치하면 언젠가 외교 문제가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애초 위령비는 고종 손자인 이우 공이 원폭으로 숨진 지점에 설치됐다. 하지만 이후 공원 밖에 위령비가 있는 것은 한국인 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처음 히로시마시 측은 ‘공원 내에 이미 많은 추모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이전에 난색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히로시마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학생들의 편지는 히라오카 전 시장이 이전을 결단하는 계기가 됐다. ‘왜 한국인 위령비는 공원 밖에 있나요’라는 편지를 읽으며 히로시마가 ‘분노의 땅’이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없는 것만 평화가 아니다. 차별, 인권 침해 등이 없어야 진정한 평화라는 사명감으로 추진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입은 원폭 피해를 들어 ‘전쟁의 피해자’라는 입장만 부각하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은 원폭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은 제국주의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나도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역사를 배웠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日, 한국과 제대로 된 화해 못 해”
1927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사업을 한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흥남, 서울 등에서 살았다. 경성제대 예과에 잠시 다니기도 했다. 히로시마 지역 신문인 주고쿠(中國)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일본 언론 최초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기사화했다.
히로시마 시장은 1945년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에 맞춰 매년 평화선언을 발표한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1991년 취임 후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 태평양 사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문구를 평화선언에 넣었다. 일본 정치인으로서 식민지배에 대한 첫 공식 사과였다. 우익 세력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꼈지만, 용기 있는 그의 선언은 중앙정치를 움직이고 한일 관계의 물줄기를 바꿨다. 그가 심은 씨앗은 현직 총리로 식민지배를 처음 공식 사과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식민지배에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이어졌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일본이 아직 한국 등 아시아와 제대로 된 역사 화해를 못 했다”고 지적했다. “피해 끼친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명확히 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사과와 맹세를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화해의 세 가지 조건이다. 기시다 총리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두고 “마음이 아프다”며 개인적 유감을 표한 것에 대해서도 “안 한 것보단 낫지만 국가로 제대로 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아쉬워했다.
히로시마=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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