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밀정, 지배체제의 모세혈관이자 기획하는 파괴자

기자 2023. 5. 1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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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은 항상
저항과 지배가 부딪치는
최전선에 있었다
파괴 전문 기획자 중에는
공동체 공동선을 내세우며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많았다
그때와 비슷한 모습은
오늘날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밀정에 관한
전문 논문도 없는 현실서
더더욱 기억해야 할
역사에 대한 기록은
파괴 전문 기획자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이 누군가와 경쟁을 시작한 이래 스파이는 존재해 왔다. 스파이는 간첩, 밀정, 세작(細作)의 다른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간첩은 북한이 남파한 비밀공작원을 지칭하며 익숙해진 말이다. 세작이란 말은 개항 이후 사라지고 대신 밀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의 대사 속에서 세작이란 표현이 간간이 등장하지만, 21세기 들어 스파이를 다룬 영화나 다큐의 제목은 ‘밀정’이 대세다. 이 여파였을까. 작년에 큰 이목을 끌었던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의 학원 및 노동현장에서의 프락치 혐의에 관한 언론 보도 역시 ‘밀정’이란 표현을 비중 있게 사용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그런데 밀정이란 표현은 한국현대사에서 자주 쓰이지 않았다. 설령 밀정이란 말을 사용했더라도 1945년 이전 일본의 침략과 연관된 내용을 소환할 때 언급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목에 밀정을 단 최근의 영상물 또한 모두 일제강점기가 대상이었다.

■ 북간도 독립운동의 판도를 바꾼 정보

일본은 밀정을 매우 다양하게 운영했다. 기관에서 밀정과 직접 접촉하기도 했지만, 친일단체가 이들을 지휘하거나 밀정이 밀정들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사소한 첩보를 제공하는 끄나풀에서부터 결정적 판세를 좌우하는 고급 정보를 팔아먹는 자, 정보팔이를 넘어 사람과 조직을 직접 파괴하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일진회원이 의병부대에 침투해 염탐한 정보를 흘렸듯이 특히 치명적인 내부의 밀정도 많았다.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밀정을 통해 내부 정보가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새어나갔다. 가령 충남 출신 밀정 이정(李楨)은 김좌진이 180㎝ 정도에 타원형의 얼굴로 흰색의 피부와 예리한 눈을 지녀 사람들이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고까지 밀고했다. 김좌진의 비서였기에 가능한 묘사였다. 일본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김좌진과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홍범도를 서로 비교하는 정보 분석까지 시도했다. 홍범도에 대해선 호걸의 기풍이 있으며 김좌진에 비해 재주가 있지 않지만, “부하들에게 신처럼 숭배받는다”고 분석했다.

둘을 비교하는 분석은 밀정을 통해 수집한 여러 첩보를 간도총영사관에서 북간도 독립군의 세력 판도까지 고려해 정보화했기에 가능했다. 이는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거치는 동안 두 지도자를 축으로 독립군이 재편되는 흐름과 세력 판도 그리고 지도자의 성향을 종합적으로 파악한 결과였다.

일본은 몇 단계 업그레이드된 정보를 바탕으로 1920년 10월 중순경부터 이듬해 1월까지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참변이라는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

이때 이주 조선인 5600여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처분당했다. 최소 1만2227명에서 최대 2만4000여명이 귀순했다. 귀순자들은 지휘자의 주소를 알려주거나 무기와 탄약 등의 은닉 장소를 특정하고 독립군을 공격하는 일본군을 안내하는 등 ‘개전의 상태가 현저’함을 증명해야 했다. 독립군으로서는 탄압의 규모와 정도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일본 스스로도 독립군의 “근거지를 모두 소탕”했고 “직업적 불령자”, 곧 독립운동가를 북간도에서 쫓아냈다고 자평했다. 한마디로 쑥대밭이 되었다.

일본은 이 공백을 틈타 이주 조선인 사회를 장악하고자 민첩하게 움직였다. 간도 침략 도중부터 1년여 만에 조선인민회를 8개에서 18개로 늘렸다. 민회는 이주 조선인 사회를 직접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일본의 정책을 보조하는 확실한 수단이었다.

기밀비도 늘렸다. 일본 외무성은 만주 조선인에 대한 영사관 경찰의 1923년도 기밀비 예산을 1922년에 비해 56%나 늘렸다. 1922년도 기밀비 가운데 밀정비 비중이 39%로 특별기밀비 다음으로 컸다. 밀정비는 160명의 밀정에게 1년간 매달 50엔을 급여로 주는 예산이었다. 예산 책정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전역의 밀정은 150명이었다. 그중 간도총영사관의 지휘를 받는 밀정이 45명으로 가장 많았다. 1927년 영사관경찰서 순사부장의 월급이 조선인은 35엔, 일본인은 58엔이었으니 밀정의 급여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일본은 자신이 바꾼 북간도 조선인 사회의 판도를 굳히는 데 밀정을 매우 적극 이용한 것이다.

■ 임시정부를 해산시키려는 교묘한 시도

비슷한 시기 상해임시정부를 파괴하는 공작을 할 때는 이와 달리 교묘하면서도 매우 정치적인 접근법이 시도되었다. 파괴 현장의 중심에 김복(金復)이라는 위장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그는 2010년대 들어 ‘3·1운동의 숨겨진 대부’로 평가받으며 평전과 방송으로 급속히 주목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2007년 출판된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아 다로의 일기가 2019년 KBS의 <밀정> 방송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반전이 일어났다.

일기에 따르면, 김복은 1919년 10월2일 우쓰노미아 사령관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조선의 자력 독립은 불가능하며 동아 대세인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두 사람은 10월16일까지 모두 다섯 차례 만났고, 임시정부를 파괴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돌리는 일에 대해 협의했다.

상해로 돌아간 그는 우쓰노미아에게 활동 경과를 알리는 편지를 최소 세 차례 보냈다. 김복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가를 이탈시켜 해산시키고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북경에 모아 조선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김복은 사령관이 직접 컨트롤하는 고급 밀정이었다.

그런데 김복의 움직임은 우쓰노미아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있었다. 그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안창호를 따르는 백남칠을 간절히 타일러 “배일 조선인의 무리에서 벗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위하는 척하며 이탈시킨 것이다. 이를 전하는 정보자료는 김복이 안창호의 부하를 점차 없애려 한다고 분석했다.

당시 안창호는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구성을 주도했고 11월부터 이동휘를 중심으로 독립전쟁 전략을 짜고 있었다. 김복의 계획은 안창호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으니 이 정보 분석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안창호를 고립시키려던 김복은 이듬해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박은식에게 부탁해 7월9일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난 것이다. 그는 첫 대면에서 안창호의 주관 아래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시베리아에서 6개 사단을 육성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안창호에게 묻지도 않고 신해혁명의 지도자 진형명(陳炯明)과 협력을 이미 약속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안창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계획이 성공할 수 있겠다고 크게 믿지 말라고 말했다. 면전에서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김복의 숨은 의도를 배제한 채 이 제안을 보면, 봉오동전투 승리 직후 새로운 무장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려는 방안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임시정부 해산이란 숨은 목표를 고려한다면 상당한 정치적 계산이 깔린 제안이다. 임시정부가 김복의 제안을 추진하는 순간부터 활동의 무게중심이 6개 사단 양성으로 완전히 옮겨가며 상해라는 운동공간이 붕 뜰 수 있다. 반대로 추진에 실패했을 때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안창호가 입는 정치적 타격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설령 추진한다 하더라도 안창호가 다섯 번째로 우려했던 사항, 곧 볼셰비키와 연계를 잘 못하면 세계로부터 동정을 잃을 수 있는데, 그리되면 임시정부는 고립되어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

김복의 말잔치 제안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1921년 3월까지 남아 있는 안창호 일기에 그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독립신문은 김복이 북경을 소혈(巢穴), 곧 악당의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적 총독부 창귀배(敵 總督府倀鬼輩)의 괴수”라는 말이 있다고 보도했다. 김복의 임시정부 해산 계획, 달리 말하면 조선총독부의 파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밀정은 천황 중심의 수직적인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말단까지 통치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모세혈관이자 에너지였다. 밀정 중에는 각지에서 독립운동 판을 뒤엎고 지배에 필요한 흐름을 짜는 파괴 전문 기획자도 있었다. 이들은 항상 저항과 지배가 부딪치는 최전선에 있었다. 파괴 전문 기획자 가운데는 공동체의 공동선을 내세우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많았다. 굳이 밀정이란 말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그때와 비슷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밀정에 관한 전문 학술논문 한 편 없는 현실에서 더더욱 기억해야 할 역사에 대한 기록은 파괴 전문 기획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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