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과 충절의 언덕에서, 치열했던 <그날>을 생각한다
[프레시안 알림]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가 지난 5월, 제91강부터 제6기를 시작했습니다. 제6기 주제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걷는 서울 역사문화탐방 둘레길>, 내년 4월까지 예정으로 열두 강의가 진행됩니다. 서울학교는 이로써 제102강을 끝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제6기 서울학교를 진행하는 최연 교장선생님은 얘기합니다.
서울학교 제6기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따라 걷는 서울 역사문화탐방 둘레길>이라는 주제로 1년간 진행합니다.
서울의 옛 지도를 보면 물줄기는 구불구불 청계천과 한강을 향해 흘러가고 산줄기는 두 물줄기 사이로 높낮이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산줄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산세를 가늠할 수가 없고 물줄기는 모두 복개되어 자동차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아직 남아 있는 서울의 산줄기를 오르내리면서 그곳에 깃들어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제6기 서울학교 일정(2023년 5월-2024년 4월)
<2023년>
제91강 인왕산 자락 톺아보기-안평대군 만나러 가는 길
제92강 고구동산에서 서달산까지-충절과 호국의 길
제93강 남태령에서 인덕원까지-정조의 능행 길
제94강 보토현에서 아리랑고개까지-정릉 가는 길
제95강 만리재에서 잠두봉까지-마포나루 가는 길
제96강 매봉산에서 궁산까지-허준과 정선 만나러 가는 길
제97강 응봉에서 낙산까지-흥덕동천 가는 길
제98강 개운산에서 동망봉까지-단종의 애절한 이별 길
<2024년>
제99강 백악에서 탕춘대 능선까지-백사실 계곡 가는 길
제100강 천장산에서 배봉산까지-홍릉 가는 길
제101강 매봉산에서 둔지산까지-독서당 가는 길
제102강 안산에서 용산까지-용산 가는 길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2강(제6기 제2강)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서달산(西達山) 자락에 안겨 있는 사육신묘와 국립현충원, 그리고 남관왕묘를 둘러보며 호국과 충절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한강 변의 정자와 조선 시대의 조운(漕運)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울학교 제92강은 2023년 6월 11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 191(노량진동 152-3) 사육신공원 정문 앞에서 모입니다. 시내버스는 사육신공원 정류장, 지하철은 1호선 노량진역 1번출구, 9호선 노들역 1번출구를 이용해주세요(사육신공원 02-813-2130).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육신묘-노량진 터(배수지공원)-효사정-용양봉저정-상도터널 위-고구동산(104m)-중앙대 후문-(점심식사)-달마사-서달산(179m)-국립현충원 상도출입문-호국지장사-창빈안씨 묘-무후선열 제단/임정요인 묘역/독립유공자 묘역-국립현충원 사당출입문-남관왕 묘-이수역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서쪽에서 온 달마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이 관악산에 이르러 한 줄기는 동쪽으로 우면산과 매봉산을 지나 봉은사를 품은 수도산에서 봉긋 솟았다가 한강으로 몸을 숨기고,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뻗어 남현동과 봉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까치고개를 지나 숭실대학교에서 총신대학교로 넘어가는 사당이고개를 거쳐 서달산(西達山, 179m)에서 힘껏 솟구칩니다.
서달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산줄기는 동쪽으로는 반포천 끝자락에 닿아 있는 갯말산에서 한강으로 숨어들고, 북쪽으로는 비개고개를 지나 십용사기념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들며, 서쪽으로는 상도터널 위를 지나 본동사무소 뒷산인 안산에서 도로를 건너 사육신공원이 자리한 봉우리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서달산은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왔다’라는 불교의 화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화장산, 공작봉이라고 달리 불리기도 하는데, 화장산은 국립현충원 안에 있는 호국지장사의 옛 이름이 화장사(華藏寺)여서 붙여진 이름이고, 공작봉은 국립현충원을 감싸고 있는 산봉우리 정상에서 뻗은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공작이 알을 품은 것과 같은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의 형국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육신의 거사
사육신(死六臣)은, 형식적으로는 선양(禪讓)의 모양새를 갖추었으나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맞서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의 여섯 분을 꼽고 있으나, 사육신 이외에도 희생된 사람은 권자신, 김문기 등과 유배지인 순흥서 2차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한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 그리고 그때 희생된 순흥의 양민들을 합치면 그 수는 수백에 이릅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있었음에도 특히 사육신만 꼽히는 것은 당시 절의파의 한사람인 남효온이 쓴 <사육신전>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3년 만인 1455년(단종 3)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조카로부터 왕위를 빼앗자 이에 분노한 충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세조 일파를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첫 번째 거사 계획은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사육신의 한 분인 유응부에 의해 모의되었습니다.
1456년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도총관 성승과 훈련도감 유응부가 검을 빼 들어 임금의 뒤에서 왕을 보호하는 직책인 운검(雲劒)을 맡게 되어 세조와 세자를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거사 당일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한 것 같은 예감에 한명회가 임금의 뜻이라며 운검을 두지 말자고 주장하여 거사 계획이 수포가 되자 함께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관 사예 김질이 미리 겁을 먹고 그의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의논한 뒤 세조에게 고변하여 거사는 실패하고 연루자들은 모두 붙잡혔습니다.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부인과 함께 칼로 자결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 앞길에서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또한 남아 있는 사육신의 가족들은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노비로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줄 사람은 친족과 친지는 물론 먼 일가나 이웃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느 스님(매월당 김시습이라는 설이 유력함)이 성승,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으나 성승의 묘는 임진왜란 이후 유실되어 네 분의 묘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1977∼1978년 서울시에서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의 묘는 선산에서 이장하였고, 유성원의 묘도 가묘로 새로 꾸며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으며 후에 김문기의 가묘도 추가되어 현재는 모두 7개 묘가 있습니다.
이렇게 민간에만 전해져 오던 육신 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습니다. 1679년(숙종 5) 왕명으로 육신 묘에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고 1691년(숙종 17) 사우(祠宇)인 민절서원이 세워지고 1692년(숙종 18) 편액이 하사되었습니다. 1782년(정조 6)에 육신 묘비인 신도비가 건립되었는데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이 찬했고 글씨는 당나라의 안진경의 글씨를 집자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민절서원은 자취를 감추고 주춧돌만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1954년 서울시가 세운 6각의 육신 묘비가 있습니다. 비면 상단에는 김광섭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고 중·하단에는 손재형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습니다. 1978년 사육신 묘역의 정화사업 때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와 정문인 불이문을 세웠습니다.
사육신 묘역 주위에는 두 개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 가던 중에 노량진에서 죽은 박태보를 배향한 노강서원으로, 반남 박씨들의 유택과 종택이 함께 있는 수락산 밑자락 의정부 장암동으로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박태보는 소론의 대가인 서계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서 장암동은 서계가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여 서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경종이 즉위하자 후사가 없던 경종의 후계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다투는 과정에서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세운 노론의 네 대신인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를 역모로 몰아 죽였는데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 네 명의 대신을 복권하고 네 명의 충신이라는 뜻으로 사충서원을 세워 배향하였으나 지금은 하남시 상산곡동에 옮겨 다시 세웠습니다.
광진, 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 한강의 5대 나루
조선 시대 한양도성에서 삼남 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는 반드시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한강에는 강을 건너는 배가 닿을 수 있도록 도로가 지나는 곳에 나루가 생겼습니다. 나루는 강폭의 넓고 좁음과 사람과 물자의 유통량에 따라 그 중요성을 달리하지만 대체로 도(渡)와 진(津)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렀으며 이러한 진도제도(津渡制度)로 생겨난 나루터는 백성들의 이동에 대한 감시가 쉬워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그곳에 별감을 파견하였습니다.
한강 변의 주요 나루터를 상류에서부터 살펴보면 광나루, 송파나루,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한강나루, 노들나루, 용산나루, 삼개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공암나루 등으로 이 중에서 광진, 송파진, 한강진, 노량진, 양화진은 한강의 5대 나루로 꼽혔습니다.
노량진은 5대 나루 중의 하나이면서 상류의 한강진과 하류의 양화진과 더불어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어서 이곳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군대가 주둔하였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수양버들이 울창해서 노들나루라고도 불렀으며 도선장의 역할을 하는 도진촌락(渡津村落)으로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라는 여관이 있어 도성을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기도 했습니다.
노량진은 한강 북쪽의 용산진과 서로 왕래하며 도성과 시흥, 수원 방면의 간선도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용산나루 주변은 넓은 모래밭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강변북로로 변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왕을 호위하는 왕의 친위부대인 용호영과 도성을 나누어 지키던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문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곳이었습니다.
임금이 도성을 떠나 능 행차를 하게 되면 한강을 꼭 건너야만 하는데 조선 초기에는 임금도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넜지만 조선 중기로 가면서 임금의 능 행차가 빈번해지자 강을 건너는 안전한 방법이 강구되었는데 그것이 배다리[舟橋]입니다.
배를 일렬로 정렬하여 강 위에 띄워놓고 그 위에 상판을 얹어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배다리 설치장소는 지형과 물살을 잘 살펴서 정해야 하는데 선정릉, 현융원(융건릉)과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는 노량진에 설치하였고 헌릉, 영릉에 행차할 때는 광진에 설치하도록 하였습니다.
노량진의 배다리는 세종과 세조가 온양온천으로 휴양 갈 때와 숙종이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특히 정조는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고 자주 거둥하여 참배하였으므로 한강을 건너는 불편을 덜기 위해 배다리를 설치하는 주교사(舟橋司)라는 전담 기구까지 만들었습니다.
한강변은 조선 시대 최고의 풍류 장소
조선 시대 최고의 풍류 장소로 꼽혔던 한강변의 전망이 좋은 바위 언덕이나 봉우리에는 왕족과 사대부들이 정자를 많이 지어 한때는 80여 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문헌상으로만 남아 있으며 그나마 위치가 확인돼 복원됐거나 표석이 세워진 것은 14곳뿐입니다.
현재 원형이 남아 있는 한강변 정자는 용양봉저정(한강대교)이 유일하며 복원된 정자는 효사정(한강대교), 소악루(가양대교), 망원정(양화대교), 낙천정(잠실대교)의 네 곳이고 복원이 어려워 표석만 세워진 정자 터는 화양정(영동대교), 압구정(성수대교), 삼호정(원효대교), 천일정(한남대교), 제천정(한남대교), 심원정(서강대교), 담담정(양화대교), 창회정(마포대교), 쌍호정(동호대교)의 9곳인데, 서달산에 기대고 있는 정자는 용양봉저정과 효사정입니다.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배다리로 한강을 건넌 정조가 어가에서 내려 잠시 쉬면서 점심을 먹은 곳으로, 머물며 주식(晝食)을 했다고 해서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고 임금이 머문 곳이라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난다는 뜻으로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원래 선조 때의 중신 이양원의 집터였는데 정조 때에 주정소로 이용되다가 고종 때 유길준에게 하사되었고 다시 1930년대에 일본사람 이께다(池田)에게 넘어가 오락장이 되었다가 광복과 함께 국유화되었으나 다른 건물들은 자취를 감추고 정자 한 채만이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효사정(孝思亭)은 민제의 사위로 태종 이방원과 동서지간이며 16세에 음서로 출사하여 경기도관찰사, 한성부윤, 대사헌, 우의정을 지낸 노한(盧閈)의 별서입니다. 노한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가끔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하고 개성에 있는 부친의 묘를 생각하며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효사정은 없어지고 그 터마저 찾을 수 없어 가까운 한강 변 낮은 언덕에 새로 신축하여 지금에 이르는데 그곳은 일제 강점기에 한강 신사가 있었습니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인 이조판서 강석덕이 지었고 그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를 남겼으며 정인지, 서거정, 신숙주, 김수온 등 당대의 문신 학자들이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을 남겼는데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 정인지의 시를 소개합니다.
큰 강 머리의 효사정에서 높은 베개 베고 (思亭高枕大江頭)
효자와 사랑스런 손자들 스스로 짝지어 쉬고 있네. (孝子慈孫自匹休)
세상이 이미 아는 덕망은 산같이 무겁고 (世德已知山共重)
집안의 명성은 오래도록 물과 같이 흐르네. (家聲長與水同流)
봄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개오동은 늙어가고 (春風搖漾松楸老)
가을날 쓸쓸하여 맑은 동리 골짜기 그윽하네. (秋日凄淸洞壑幽)
하늘 보고 땅을 보며 품은 뜻 누가 알아주리오. (俯仰情懷誰識得)
때때로 보는 북쪽 대궐에는 서기 같은 연기 떠오르네. (時看北闕瑞煙浮)
소악루(小岳樓)는 양천현의 주산인 궁산에 세워진 정자로, 한강의 경치와 강 건너 덕양산과 멀리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 좋은 곳으로, 겸제 정선이 양천 현감으로 있을 때 이곳에 올라 한강 변의 좋은 풍광을 그린 그림이 화첩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망원정(望遠亭)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별장을 지어 강상(江上)의 풍경을 즐기던 곳입니다. 세종이 어느 날 농사를 시찰하러 이 정자에 나왔을 때는 날이 가물던 중에 비가 흡족하게 쏟아졌다고 해서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부르며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륙 양군의 훈련장으로도 유명하였습니다. 1484년(성종 15)에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고 이름도 망원정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낙천정(樂天亭)은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 준 후 편히 쉬던 곳으로, 정자가 세워진 곳은 주위보다 약간 높은 지대여서 대산(臺山, 42.8m)이라 불렸습니다. 대산 서북쪽 모퉁이에는 이궁도 지었으며 태종은 이곳에서 세종과 정사도 논의했다고 하는데 좌의정 박은이 <주역>에 나오는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故不憂)”라는 글귀를 따 정자 이름을 낙천정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화양정(華陽亭)은 태조 때부터 말을 먹이는 뚝섬의 말들이 떼지어 노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세종 때 지은 정자로 동지중추원사 유사눌이 <주서(周書)>에 나오는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고 하였습니다.
압구정(鴨鷗亭)은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의 별장으로,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倪謙)이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라는 뜻으로 ‘압구정’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한명회가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 여생을 지내려 하자 임금이 압구정시를 친제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하여 그 시가 수백 편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삼호정(三湖亭)은 조선 후기 여류시인들이 시회를 열었던 헌종 때의 의주 부윤을 지낸 김덕희의 별장입니다. 그는 시문을 잘 짓는 기생 출신의 김금원을 소실로 두었는데 그녀는 1847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기녀, 서녀 출신 소실들로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만들어 삼호정에 모여 시회를 열었습니다.
천일정(天一亭)은 고려 시대의 절터에 세워진 개인 소유 정자로, 성종 때 황희 정승의 손자사위인 김국광이 처음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이 이 정자를 소유하였다가 조선 후기에는 민영휘의 별장이 되었는데 현판 휘호는 청나라 사람인 옹동화(翁同龢)가 민영휘에게 써준 글씨이고,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의 <등왕각(藤王閣)> 서문에 나오는 “가을 물빛이 하늘빛과 함께 길다(秋水共長天一色)”라는 시구에서 따 왔습니다.
제천정(濟川亭)은 왕실 소유의 정자로 1456년(세조 2)에 세워졌으며 1563년(명종 18)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으로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나와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구경 하기 좋은 곳으로도 꼽혔습니다. 광희문을 나와 남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이나 정릉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고 중국 사신이 오면 언제나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심원정(心遠亭)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가 화전 교섭을 한 정자로 용산구문화원 부근 언덕에 그 터가 남아 있습니다.
담담정(淡淡亭)은 조선 초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로,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 여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를 베풀곤 했는데 이 정자에 거동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가 폐허가 된 터에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창회정(蒼檜亭)은 조선 초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주 놀러 다녔던 곳이며 한명회와 권람을 만나 대사를 논의하였던 곳입니다.
쌍호정(雙虎亭)은 1808년(순조 8)에 출생한 조대비의 생가 옆에 있던 정자로서, 조대비가 출생할 때 두 마리의 호랑이가 정자 앞에 와 있었다 하여 쌍호정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이 일대는 자연 풍경이 빼어나 문인 명사들이 정자를 짓고 여가를 즐겼으나 1911년 경원선 철도 부설 이후 옛 정취는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서달산에 기대고 있는 국립현충원
서달산 서쪽 산록에 자리 잡은 달마사는 유명한 선승 만공의 제자인 유심이 1931년 창건한 조계종 사찰로서 일제 강점기 때는 만공 스님이 가끔 법문을 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이웃한 국립현충원의 지세를 살려 영산전 납골봉안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서달산에 기대고 있는 국립현충원은 형국이 공작이 알을 품고 있듯 상서로운 기맥이 흐르는 것 같아 ‘공작포란형’이라 하며 앞을 흐르는 한강수가 용트림하듯 흐르고 있어 지세를 한층 더 수려하게 뽐내게 합니다.
1956년 제정된 ‘군묘지령’에 의해 초기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장병들과 순직한 군인, 군무원, 그리고 국무회의 의결로 순국선열, 국가유공자까지 모시게 되었고 1965년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되었으며, 2005년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뀌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 대상자에 포함되었습니다.
국립현충원의 묘역은 국가원수 묘역, 임시정부요인 묘소, 독립유공자 묘역, 무후선열 제단, 국가유공자 묘역, 장군 묘역, 장병 묘역, 경찰 묘역, 외국인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임시정부요인 묘소에는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을 비롯하여 이상룡(국무령), 김동삼(서로군정서 참모장), 지청천(군무총장/정의부 총사령), 김성숙(국무위원/승려) 등 18분이 모셔져 있으며 무후(無後)선열 제단에는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분 중 유해를 찾지 못하거나 후손이 없거나 납북된 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창빈안씨 묘는 동작릉(銅雀陵)이라고도 불렸으며, 배치와 규모를 통해 조선왕실 후궁의 묘 제도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후궁 원묘에 보기 드문 신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도비는 지반석과 좌대석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장중하고 지붕돌은 유난히 크며, 꼭대기의 연단을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긴 전액은 동평균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항이 ‘昌嬪安氏神道碑銘’이라 썼고,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이 짓고 행 판돈녕 부사 이정영이 썼습니다.
건립 연대는 비문 끝의 ‘숭정기원후오십육년(崇禎紀元後五十六年)’ 기록으로 1683년(숙종 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묘소는 1547년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마련되었으나 이듬해 지금 위치로 이장되었습니다. 국립묘지 산 중턱에 자리한 이 묘소는 곡장이 둘려진 봉분 앞에 묘갈, 혼유석, 석등과 문인석 한 쌍이 서 있습니다.
창빈안씨는 본관이 안산이며, 경기도 시흥에서 중종반정의 원종공신인 안탄대의 딸로 태어나 1507년(중종 2) 궁녀로 입궁했습니다. 미모는 뛰어나지 않지만, 성품이 차분하고 행동거지가 정숙하여 정현왕후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정현왕후는 안씨를 아들 중종의 후궁으로 추천하여 1520년(중종 15) 안씨는 정5품 상궁에 배수되고 1529년(중종 24) 종4품 숙원을 책봉받았으며, 1540년(중종 35) 종3품 숙용까지 올랐습니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57세로 승하하자, 3년 복제 이후 인수궁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는데, 안씨는 평상시 품행이 단정한데다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와 사이도 돈독하여 특별히 궐에서 머물도록 명하였습니다.
창빈안씨는 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영양군과 정신 옹주, 그리고 후대 조선 왕통을 이끌어갈 덕흥군을 낳았습니다.
후계자 문제로 정치가 불안정하던 중종 시절, 안씨는 궁궐 생활에 눈에 띄지 않았고 품행이 단정해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와도 잘 지냈습니다. 중종 사후에도 문정왕후의 만류 덕분에 안씨는 여승이 되지 않고 궁궐에 머물 수 있었으며 안씨가 죽은 이후에도 문정왕후는 안씨의 세 자녀를 잘 돌봐주게 됩니다. 그런 인연 덕분인지 문정왕후의 외아들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의 정실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습니다. 이로써 선조와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안씨의 후손들이 되었습니다. 창빈의 직계 후손으로 선조 이후 360여 년 동안 조선의 역대 임금이 계승되었습니다.
안씨의 생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이 왕위에 오른 덕분에 안씨는 내명부 정1품 빈으로 추존되어 창빈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묘소에 국립서울현충원이 세워지고 묘 주변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4명이나 묻히면서 그 영광을 더했습니다.
호국지장사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갈궁사(葛宮寺)로, 고려 공민왕 때 보인이 중창하고 화장암(華藏庵)이라 개명하였던 것을 조선 시대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안씨의 묘를 국립현충원 안으로 모시게 되자 화장암을 그 원찰로 삼고 화장사로 승격시켰습니다.
서달산 남쪽 산록에 관우를 모신 사당
서달산 남쪽 산록에는 관우를 모신 사당인 남관왕묘(南關王廟)가 있습니다. 왕의 조상들을 모시는 사당이 종묘(宗廟)이고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를 배향하는 사당인 대성전을 문묘(文廟)라 하며 관우를 모신 사당을 무묘(武廟)라 부를 정도로 같은 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관왕 숭배사상은 명나라 초기부터 성행했던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군사들로부터 퍼져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관우의 음덕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전란 중에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가 민간신앙으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관왕묘가 동대문 밖에 동관 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 묘, 명륜동에 북관 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 묘, 종로 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 묘의 다섯 곳에 있었으나 동관 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남관 묘는 일제가 목멱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다른 세 곳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관왕묘가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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