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주가조작이 중범죄인 또 다른 이유

2023. 5. 16.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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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들이 수집하고 분석한
기업가치가 담긴 게 주가인데
가격 조작은 그 기능을 망가뜨려
제도 허점 방치, 솜방망이 처벌땐
신뢰 무너져 기업 자금줄도 막혀
김도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1985년 케네스 레이는 두 천연가스 회사를 합병해 엔론을 설립하고 미국 전력시장을 개척한다. 그는 의회 로비를 통해 천연가스를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1992년 마침내 엔론을 북미 최대 천연가스 판매 회사로 키웠다. 이후 사업을 여러 분야로 다각화하면서 발생한 채무와 손실을 복잡한 금융 구조와 회계 조작으로 감춰 주가를 부양한 결과, 2000년 엔론의 시장 가치는 무려 600억달러에 이르게 된다.

8년여에 걸친 회계 부정과 주가 조작은 2001년 사내 회계사의 고발에 따라 세상에 드러나고 2000년 중반 90달러에 달했던 주가는 2001년 말 1달러 밑으로 추락한다. 미국 경제사에 ‘희대의 주가 조작’ 사건으로 기록된 이 일로 레이는 막대한 벌금과 함께 징역 45년형을 선고받았다.

주가 조작은 회계 부정 말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진다. 지난달 말 국내 주식시장에서 삼천리, 서울가스 등 8개 회사의 주가가 연일 폭락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 주가는 특별한 호재 없이 장기간 꾸준히 상승해 수배나 올랐다가 SG증권의 차액결제거래(CFD) 계좌를 통해 매도 물량이 쏟아지면서 곤두박질쳤다. 검찰과 금융당국은 이 같은 주가 흐름과 대량 매도가 비정상적이라고 보고 조사에 들어갔고, 작전 세력의 조직적인 주가 조작 정황이 드러났다.

주가 조작은 결국 주가를 폭락시켜 이를 모르고 해당 주식에 투자한 선량한 일반 투자자에게 큰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중범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가 조작의 피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식시장을 교란해 기업의 자금 조달을 저해할 수 있다.

상당수 기업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외부로부터 조달한다. 이를 위해 기업은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하는데, 이때 가장 큰 걸림돌은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이다. 투자자가 투자 원금을 확보하고 얼마만큼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가는 기업이 사업을 통해 미래에 실현할 수 있는 수익, 즉 ‘기업 가치’에 달려 있다. 투자자가 이를 잘 모른다면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기업은 자금 조달에 애로를 겪거나 높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때 기업의 주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존 주식이 거래되고 있는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은 기업의 사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기업가치에 비해 과소 평가된 주식은 매수하고 과대 평가된 주식은 매도하는 방식으로 차익 실현에 나선다. 그 결과 주가는 주식 투자자들이 수집하고 분석한 기업 가치에 대한 정보를 담게 된다. 주식시장이 효율적일수록 기업 가치에 대한 정보가 주가에 정확히 반영된다. 투자자는 주가가 주는 기업 가치 정보를 신뢰하고 그 정보에 따라 기업이 신규로 발행하는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할 수 있다.

주가 조작은 회계 부정에 의한 것이든 작전 세력에 의한 것이든 주가의 정보 기능을 망가뜨린다. 주가가 더 이상 기업 가치 정보를 담고 있지 않아 주가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물론 한 번의 주가 조작 사건으로 주가에 대한 신뢰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전 세력이 통정거래를 손쉽게 은닉할 수 있는 차액결제거래 계좌와 같은 제도적 허점이 산재해 있고, 주가 조작을 조기에 발견하고 차단할 수 있는 감독 기능이 부재하며, 이유 없는 과도한 주가 상승을 시장에서 통제할 수 있는 공매도가 제한돼 있고, 주가 조작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인 법 제도 아래서라면 주가 조작은 또다시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당연히 주가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 가치에 대한 정보 비대칭을 해소할 수 없는 투자자는 다시금 기업이 발행하는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기를 꺼리게 된다. 결국 주가 조작은 기존 주식시장을 교란해 신규 발행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위축시키고 기업 투자를 저해하는 문제를 낳는다.

우리는 주가 조작이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경시한 채 주가 조작으로 인한 부당 이득과 피해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 선진국인 미국이 레이에게 징벌적 벌금과 장기 징역형을 선고한 것처럼 주가 조작을 엄벌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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