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의 시 읽는 마음] 크림

2023. 5. 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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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귀여워라, 홀린 듯 다가가 머리통을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었던 것 같다.

강아지는 조금도 귀엽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것은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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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인
윽박지르고 윽박지르고 윽박지르다 보면
슬픔이
흐르지 않고 굳어집니다
그럼 얼결에 조금은 단단해진 기분이 들고
미세 거품 같은 것도 생겨서
허세랄까
날 부풀릴 수 있어요
 
작은 구멍을 한아름 안고 살아갑니다
만져 보세요
부드러워요
 
수십 개의 손에 머리 가슴 배를 내맡긴 채로
체념한 강아지가 이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걔는 크림이에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크림’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다. 서너 번쯤? 하나같이 털이 희고 눈매가 순한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귀여워라, 홀린 듯 다가가 머리통을 쓰다듬으면 꼬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이 “윽박지르고 윽박지르고 윽박지른” 결과라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아지는 조금도 귀엽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것은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다. ‘슬픔’에 대한 이야기. 어쩌다 보니 강아지를 닮아버린 나의 슬픔. 내 속에 고인 무른 “슬픔이 흐르지 않고” 굳어질 수 있도록 애를 써본 이야기. “조금은 단단해진 기분”이 들지만 무수한 구멍들은 결코 감춰지지 않고…. 슬픔은 결국 크림이 되었구나. 눈물보다 진하고 끈적끈적한.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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