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표류하던 실손보험 간소화 통과 기미에···개원의사·시민단체 반발
개원의사단체·무상의료본부 등 기자회견
14년째 공회전하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개원의사와 일부 시민단체가 "보험사들의 배만 불릴 것"이라며 비판 목소리를 냈다. 보험사들이 무분별하게 개인 의료정보를 수집해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의료 민영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심장혈관흉부외과의사회와 성형외과의사회, 소아청소년과의사회, 신경외과의사회, 일반개원의협의회, 정형외과의사회, 마취통증의학과의사회 등 7개 단체는 15일 서울 이촌동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중계기관으로 민감한 개인 의료정보가 넘어가게 되는 현행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어선 안된다"며 "국민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보험사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대국민 사기극이나 다름없다"고 강도높게 비판했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직접 스마트폰 앱으로 보험금을 쉽게 청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이미 갖춰져 있는데도 중계기관을 하나 더 만들려는 데는 청구 과정에 허들을 만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게 이들 단체의 지적이다.
이들은 "지금도 실손보험 손해율을 핑계로 보험급 지급을 거절하면서 소비자 피해가 폭증하고 있다"며 "환자의 많은 의료정보가 고스란히 보험사로 넘어가 축적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험금 지급 거절, 보험 가입 및 갱신 거절, 갱신 시 보험료 인상의 자료로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중계기관이 만들어진다면 조직과 운영의 의무를 가입자가 부담하게 되어 불필요한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며 "보험계약 당사자가 아닌 의사를 청구 과정에 참여시켜 부당한 의무를 강요할 뿐 아니라 보험금 청구와 심사, 지급 과정을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고 해킹 위험 등 부작용 소지가 많다"고도 덧붙였다.
이들 단체는 궁극적으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부득이 청구 간소화를 추진해야 한다면 중계기관이 빠진 대체 법안을 만들고, 환자와 의료계, 보험사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협의회는 "의료기관에서 청구에 필요한 의료정보를 최소화해 합의된 서식을 만들고, 환자가 신청하는 경우 중계기관을 거치는 대신 의료기관에서 직접 해당 보험사에 서류를 전송하는 형태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의료기관에서 대신하는 행정 비용을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고도 못 박았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관련 자료를 의료기관에 요청하면 중계기관의 전산망을 통해 보험업계로 바로 전송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실손보험은 2020년 기준 전 국민의 80%(4138만 명)가 가입해 ‘제2의 건강보험’으로도 불리지만 보험금 청구 절차가 까다로워 소비자들의 불만이 컸다. 현행 제도는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금을 지급받으려면 병원을 직접 방문해 진료 영수증, 진단서, 진료 세부내역서 등의 문서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하는 구조다. 이러한 번거로움 때문에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소비자단체가 지난 2021년 실손보험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47.2%가 '지난 2년간 청구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병원을 방문할 시간이 부족했다’, ‘증빙서류를 보내는 게 귀찮았기 때문’ 등이 이유로 꼽혔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국민권익위원회가 2009년 보험사별로 달랐던 보험금 청구 양식을 통일하고, 방법도 더 간단하게 바꿔야 한다고 권고한 이후 관련 법안이 수차례 국회에 발의됐지만 번번이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혀 14년째 진척이 없었다.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대한약사회·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 등 의료직역 단체들은 "민감한 개인 진료기록을 민간 보험사에 넘기면 결국 국민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것"이라며 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런데 올 초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의료계가 거부한다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입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히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3월부터는 정부, 보험업계, 의료계, 소비자단체 등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8자 협의체’가 가동되며 법안 통과 기대감이 무르익었는데, 중계기관 선정 및 방식을 두고 의료계와 보험업계 간 이견차가 좁혀지질 않아 좀처럼 진척이 없었던 상황이다. 의료계가 그동안 국회에 발의된 법안에 중계기관으로 거론되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반대하자 최근 보험업계가 보험개발원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이마저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관련 법안이 논의된다고 알려지자 개원의사들이 서둘러 기자회견을 개최한 것이다.
해당 법안은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직면했다. 무상의료운동본부와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는 이날 국회 앞에서 실손 보험 청구 간소화 반대 기자회견을 열고 "환자 편의를 위한다는 보험업계의 주장과 달리 보험사의 의료정보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며 “법안 통과 시 민간 보험사가 환자 의료 정보를 손쉽게 수집해서 영리적으로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환자 정보가 보험사의 상품 설계, 보험금 지급 기준 마련 등에 활용된다면 보험금액 차별 등의 결과를 낳을 수 있고, 고령층 환자는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게 이들 단체의 주장이다. 박민숙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부위원장은 “내일 정무위에서 해당 법안이 통과될 경우 보험사들은 국민들의 개인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해 환자에게 불이익을 주고 의료민영화를 추진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체계적으로 축적된 환자의 진료 내역은 더 많은 암·중증 환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될 명분으로 작용할 뿐"이라며 "보험개발원은 보험회사가 출자해 설립한 단체로 삼성화재와 교보생명, 동국생명 사장 등이 임원으로 있어 공공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중계기관을 맡아도 보험사 위주의 민영화 명분을 제공한다는 근본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국장은 "환자 개인 정보를 전산으로 전송한다는 것 자체가 의료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정부가 정말 실손보험 가입자들의 보험급 지급률을 높이고 싶다면 민간보험사의 최저 지급률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안경진 기자 realglasses@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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