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태국 왕실과 군부 동시에 심판한 ‘정치적 지진’

이철희 논설위원 2023. 5. 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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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방콕 근처 골프장에서 일본인 20명이 태국군 차량 3대에 실려 군 시설로 연행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현 국왕의 각종 기행과 사생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그토록 금기시되던 군주제 개혁도 정치적 도마에 올랐다.

무능한 군부에 대한 철저한 심판, 신뢰 잃은 왕실에 대한 깊은 회의, 나아가 탁신 가문의 포퓰리즘에 대한 실망까지 태국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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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방콕 근처 골프장에서 일본인 20명이 태국군 차량 3대에 실려 군 시설로 연행된 적이 있다.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의 국상 애도 기간에 먹고 마시며 떠드는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다행히 ‘엄중 주의’를 받고 풀려났다. 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왕실모독죄를 처벌하는 나라다.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사람은 최장 1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그럼에도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현 국왕의 각종 기행과 사생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그토록 금기시되던 군주제 개혁도 정치적 도마에 올랐다.

▷14일 치러진 태국 총선에서 왕실 개혁과 군부 타도를 내세운 진보정당 전진당(MFP)이 하원 500석 중 152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이 이끄는 프아타이당도 141석으로 선전했지만 2001년부터 유지하던 제1당 자리를 빼앗겼다. 군부 축출을 내건 양대 야당이 60% 가까운 하원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반면 육군참모총장 출신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창당한 룸타이상찻당(UTN)은 36석에 그치는 등 군부 계열의 정당은 모두 80석에 못 미쳤다. 무능한 군부에 대한 철저한 심판, 신뢰 잃은 왕실에 대한 깊은 회의, 나아가 탁신 가문의 포퓰리즘에 대한 실망까지 태국 민심의 현주소를 보여준 결과였다.

▷외신이 ‘정치적 지진을 일으켰다’고 평가한 전진당은 43세의 피타 림짜른랏이 이끄는 신예 정당이다. 피타는 기업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대학 졸업 후 부친이 경영하던 쌀겨기름회사를 잠시 운영했고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석사를 땄다. 동남아 모빌리티 플랫폼 ‘그랩 타이’의 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태국 선거사에서 처음으로 왕실모독죄 폐지를 공론화한 그는 징병제 폐지와 동성결혼 합법화 같은 급진적 정책까지 내세우며 2030세대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뛰어난 토론과 연설 솜씨로 청년층에서 록스타급 인기를 누리고 있고, 총리 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도 진작에 1위를 예고했다.

▷피타는 어제 트위터에 “여러분이 동의하든 아니든, 제게 투표했든 아니든 저는 여러분의 총리가 되어 봉사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가 총리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2017년 헌법 개정으로 총리 선출에는 하원 500명 외에 군부가 임명한 거수기 상원 250명도 참여한다.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과반인 376석 이상을 얻어야 하지만 전진당과 프아타이당 두 야당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군부 주도 연립정부에 참여했던 품짜이타이당 등 중도 정당을 끌어와야 한다. 당장 군주제 개혁에 대한 다른 정당들의 경계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전진당의 최대 숙제가 됐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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