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전통 판소리 무대… ‘소리꾼 왕가네’ 형·동생이 뭉쳤다

이강은 2023. 5. 1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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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일이관지-성악’ 공연
국립전통예술중고 교장 왕기철 명창은
경상도 특유 ‘박녹주제 홍보가’ 박타령
국립민속국악원 원장 왕기석 명창은
전라도 성음의 ‘박초월제 수궁가’ 불러
조카·딸 왕시연과 ‘흥보가’ 화초타령도
“드문 무대… 관객 기대 충족하려 맹연습”

“교장실에서 연습할 때도 있는데 아무래도 큰 소리를 못 내니 혼자 운전하는 동안 연습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웃음)”

왕기철(62·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 명창은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 한 달째 판소리 ‘흥보가’와 전설적 명창 임방울(1905∼1961)의 단가 ‘추억’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경기 남양주 화도읍 집과 서울 금천구 학교까지 매일 차로 왕복 3시간 길을 달리면서 소리를 연마하는 것이다. 국립국악원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친구·형제·부부 등으로 뭉친 명창들의 전통 판소리를 소개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성악’ 공연(16∼25일)을 앞두고서다.
‘형제 명창’으로 유명한 왕기철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교장(오른쪽)과 왕기석 국립민속국악원 원장이 18일 함께 무대에 서는 국립국악원의 ‘일이관지’ 공연을 앞두고 전북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에서 환하게 웃으며 찍은 기념사진. 왕기철 명창이 두 살 많은 형이다. 국립국악원 제공
왕기철 명창은 18일 동생 왕기석(60·국립민속국악원 원장) 명창과 무대에 오른다. 두 사람은 ‘형제 명창’으로 유명하다. 지난 9일 교장실에서 만난 그는 형제 둘이서만 하는 공연 프로그램이 매우 드문 일이라 관객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 더 열심히 연습한다고 했다. 이번 무대에서 왕 명창은 경상도 특유의 강한 소리가 돋보이는 ‘박녹주제 흥보가’의 박타령을, 왕기석 명창은 전라도의 깊은 성음이 특징인 ‘박초월제 수궁가’에서 범 내려온다 대목부터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부른다. 마지막 순서에는 왕기석 명창의 딸이자 소리꾼인 왕시연과 함께 ‘흥보가’의 화초타령을 선보인다. 형(왕기철)이 흥보를, 동생(왕기석)이 놀보를 맡고, 왕시연은 부자가 된 흥보의 하녀 역으로 출연한다. “국립창극단에서 ‘흥보전’을 할 때도 제가 흥보를, 동생이 놀부를 맡았어요. 동생이 수염도 길고 형님처럼 생겼잖아요.(웃음) 반대로 저는 동생처럼 보이고 흥보와 비슷한 인상이라 그런지 창극단에서 그렇게 역할을 정해줬습니다. 물론 동생은 흥보를 맡아도 잘했을 겁니다.”

실제로 두 명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형·동생을 혼동할 만하다. 왕 명창은 “사람들이 ‘형님 잘 계시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며 웃었다. 그의 딸 왕윤정(33)이 아버지를 이어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약 중인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소리꾼 왕가네’다.

전북 정읍 옹동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8남매 중 일곱·여덟째로 태어난 형제가 국악인이 된 건 박초월 선생의 제자였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셋째 형(왕기창) 덕분이다.

왕 명창은 열여섯 살일 때 상경했다. 향사 박귀희(1921∼1993·국가무형문화재) 명창이 남성 제자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형이 급히 부른 것이다. “선생님께서 노래를 불러보라 해서 그나마 조금 알았던 ‘진도아리랑’을 불렀는데 바로 제자로 받아주셨어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평생의 은인이시죠.” 박귀희 명창은 국립전통예술중·고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왕 명창은 그 학교와 스승이 운영하던 학원을 오가며 가야금 병창(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과 소리를 배웠다. 고생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삼수 끝에 2001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장원)으로 보상받았다. 왕기석 명창도 국립창극단 단원이던 형(기창)을 만나러 갔다가 남해성(1935∼2020·국가무형문화재) 명창의 눈에 띄면서 열여덟 살에 창극단 연수단원으로 소리꾼이 됐다. 이후 2005년 같은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형제 명창 1호’가 탄생하게 됐다.

왕 명창은 한양대 국악과 졸업 후 1985년 모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무대에 대한 갈증을 못 이겨 1998년 관두고 이듬해 국립창극단 단원 시험을 봐 합격했다. 39살로 늦은 나이였지만 창극단 선배인 동생을 롤모델 삼아 부지런히 배웠다. 연기는 부족해도 워낙 소리가 좋아 입단 첫해부터 창극단의 ‘심청전’ 무대에 동생과 함께 심봉사 역을 맡았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왕윤정도 ‘어린 심청’ 역 오디션을 통과해 부녀가 처음 같은 무대에 섰다.

왕 명창은 후학을 양성하고자 14년여가 지난 2013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2017년 임기 4년의 16대 교장이 된 후 풍부한 현장 경험을 접목해 전통예술 명문학교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재임용에도 성공해 2025년까지 학교를 이끈다. 틈틈이 공연도 하는 왕 명창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을 때까지 소리를 할 것”이라며 “지난해 코로나19 감염으로 완벽하지 못했던 인생 마지막 완창(‘흥보가’) 무대에도 다시 도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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