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카텔란의 ‘바나나’ 소동과 벌거벗은 임금님

한겨레 2023. 5. 1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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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의 <코미디언>. 리움미술관 제공

[왜냐면] 최종철 |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전시에 설치된 작품 <코미디언>(2019)의 바나나를 누가 또 먹어버린 모양이다. 이번에는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는 20대 대학생이다. 왜 먹었냐고 물어보니 “아침을 먹지 못해 배가 고파서”라고 대답했다 한다. 작품이 먹혀 없어졌으니 큰 소동이 날 법도 하지만, 작가 본인도, 작품을 전시했던 갤러리도 화를 내거나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나흘에 한 번씩 새 바나나로 교체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먹히는 일은 흔치 않은 뉴스거리며, 이를 통해 자연스레 작품의 유명세가 커질 테니까.

최근 기사를 보니, 그 대학생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유명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지인과 공모해 자신의 예술 파괴 행위를 녹화하고 인터넷에 공개하는 등 이른바 ‘관종 짓’을 했기 때문이란다. 한 미술계 인사는 기사 말미에 이 학생의 행위가 ‘진지한 고민이나 의미 없이 그저 관심을 끌어보려는 의도로 해설될 뿐’이라 언급했다.

그런데 ‘진지한 고민이나 의미 없이 관심을 끌고자 했던’ 이는 정작 카텔란 본인이 아닌가? 국내 최고 사립미술관에서 거액의 전시료를 받고 벽에 바나나 따위를 붙인 행위가 어떤 진지한 예술적 통찰을 전할까? 혹자는 소변기(<샘>, 1919)를 전시한 다다이즘 대가 마르셀 뒤샹을 거론하며 바나나의 전위성을 웅변하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뒤샹의 변기는 미술관에 대한 공격을 통해 예술과 예술제도를 혁신하기 위해서지, 카텔란처럼 미술관과 결탁하고 그 제도적 수혜 속에서 자신의 명성과 작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뒤샹의 반예술적 혁명은 변기를 합법적 예술품으로 탈바꿈시킨 제도의 아이러니 속에서 좌절되고 말았으며, 이 좌절된 전위를 재소환하는 카텔란과 같은 뒤늦은 뒤샹주의야말로 실패를 반복하는 모순적 시도라는 게 미술사의 중론이다.

그러니 이처럼 낡은 전위의 수사를 반복하는 아이러니에 왜 국내 최고의 미술관과 관객들이 열광하는지 그저 의아할 따름이다. 카텔란의 바나나에 환호하고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은 분들께 묻고 싶다. 바나나는 당신들을 어떤 감동적인 예술의 경험으로 인도했는가? 바나나가 전위의 반복적 클리셰 너머로 새로운 미학적 통찰을 줬다면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대답하기 힘들다면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을 대단하다 칭송한 저잣거리의 위선적 백성들에 불과하다. 사기꾼 재단사에 속아 ‘무식한 바보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가짜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며 거리를 활보한 임금님, 자신들의 무지가 드러날까 봐 임금의 벌거벗은 몸에 걸쳐진 그 보이지 않는 옷이 훌륭하다고 칭찬한 가식적인 신하들과 백성들이야말로 카텔란의 바나나에 걸쳐진 ‘무식한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학적 가치’를 보인다 외친 우리 자신들이 아니었을까?

벌거벗은 임금의 진짜 무지는 행렬 끝에 ‘임금님이 벌거벗었네’라고 외친 한 꼬마에 의해 드러나고 말았다. 카텔란의 바나나가 현자에게만 보이는 훌륭한 예술품이 아니라, ‘배고프면 집어먹을 수 있는 바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 그 대학생의 오지랖 덕에 우리 모두의 무지가 드러난 셈이다. 그러니 그가 관종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탓하지 말자. 임금의 벌거벗음을 외치고자 했다면 칭찬해야 마땅하고, 오직 관심을 원했다면 앤디 워홀의 유명한 말대로 ‘그 관심 오직 15분만 유효할 테니 그 시간 마음껏 즐기고 내려오라’고 어른스럽게 얘기해주면 될 일이다. 대신 다투어야 할 더 중요한 논쟁은 바나나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미술사 용어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키치’를 선택할 것이다. 명망 있는 모더니즘 이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전위가 아닌 전위의 대용 문화라 부른 그 키치, 진정한 전위 예술처럼 ‘창조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의 효과만을 모방’하는 키치 말이다.

키치는 날조된 감각으로 대중을 기만하고, 쉽고 익숙한 대상에 호응하는 그들의 순진함을 이용해 자신의 문화적 영향력을 넓힌다. 밀란 쿤데라는 그러한 키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존재의 ‘똥’이라 부른 바 있다. 다원주의와 해체주의의 혁신적 사유들 속에 기생해온 가짜 예술들, 그 어떤 ‘예술의 에로스’도, ‘텍스트의 즐거움’도 없이 그저 온갖 감언이설로 대중을 선동해 온 뒤샹의 시대착오적 모방자들, 바나나는 그러한 키치의 상징이다.

미국의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그처럼 경박한 현대미술이 “겉만 번지르르하고, 제멋대로이며, 따라서 진짜가 아닌 가짜 예술로 즉시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는 키치가 우리가 숨 쉬는 바로 그 문화의 오염된 공기가 됐기 때문”이라 한탄한 바 있다. 실로 우리는 매일 오염된 공기를 마신다. 혹자는 이 오염된 공기가 새로운 우리의 현실이라 주장할지 모르지만, 기억해 보시라, 어린 시절 느꼈던 가슴이 뻥 뚫리도록 맑고 시원한 공기를, 온몸을 휘감는 그 감미로운 감각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고, ‘매 순간 그 자체가 온전히 드러나는’ 그 현전의 경험이야말로 예술이 그저 순간을 사는 인간들에게 내리는 가장 강력한 ‘은총’이다.

내가 바나나를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예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진지한 예술들을 통해 매일 새롭고 신선하게 돋아나는 그 믿음을, 매우 낡고 상투적인 방식으로 조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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