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71> 기술의 발전과 예술의 본질] AI가 재현하기 어려운 예술을 향한 인간의 히스토리
차를 타고 라디오를 들을 때도, 소파에 앉아 무심코 TV 뉴스를 보는 동안에도 오늘 하루 챗GPT라는 단어를 족히 열 번 이상 들은 듯하다. 올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전 세계 주요 매체에서 챗GPT와 관련된 소식을 다루고 있다. 챗GPT는 오픈AI라는 회사에서 출시한 인공지능(AI) 챗봇이다. 기존의 한정적인 자료를 분석해서 제한적인 답을 주는 챗봇 대신 이 챗GPT는 대량의 언어를 최신 AI 기술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작업 능력으로 인간이 하는 말의 문맥, 배경 등을 이해하고 답하는 등 거의 인간과 인간의 대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화한 대화형 AI 서비스다. 코딩, 복잡한 사칙연산 그리고 의료, 법률 같은 전문 분야와 관련한 신뢰 높은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시, 소설 같은 창작도 일정 수준 이상 가능하다.
필자도 호기심에 몇 번 사용해 봤는데, 특히 음악 관련 원서를 리서치할 경우 큰 도움이 됐다. 일례로 최근에 17세기 독일 바로크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남긴 편지를 살펴볼 일이 있었다. 현대 독일어와 다른 바흐가 살던 바로크 시대의 독일어 용법이 익숙하지 않아 원서 내용을 현대 독일어로 바꿔 달라고 챗GPT에 지시했더니 정말 알아보기 쉽게 바꿔줘 놀랐다. 또 반대로, 현대 프랑스어로 필자의 감정을 담은 간단한 문장을 주고 프랑스 바로크 작곡가 프랑수아 쿠프랭(François Couperin)이 살던 17세기 프랑스 문학 스타일이 반영된 시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정말 꽤 그럴듯한 작품이 나왔다.
이런 기술의 진보는 인간에게 감흥과 걱정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이 기술을 통해 정보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습득하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 올바른 목적을 상실할 경우 도덕, 윤리에 반한 일도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가 피아니스트인 이상 이렇게 진일보하는 기술이 음악과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하고 걱정도 된다.
올 초 필자도 기술과 관련된 꽤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비록 챗GPT는 아니지만 진보한 기술을 음악과 어떻게 접목하려고 시도 중인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현재 근무하는 대학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로베르트 슈만의 한 피아노 작품을 녹음했다. 일반적인 마이크로 녹음하는 것이 아닌 스타인웨이앤드선스(Steinway & Sons)의 자동연주피아노 ‘스피리오(Spirio)’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녹음을 진행했다. 신기한 점은 이 스피리오는 필자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 손가락이 건반에 접촉하는 압력을 초당 800번의 빈도, 1020단계의 세기로 인식한다. 또 발로 페달을 누르는 것을 초당 100번의 빈도, 256단계의 깊이로 인식한다. 그리고 필자가 연주를 마친 후 재생 버튼을 누르면 녹음 시 입력된 값을 그대로 재생하는데, 필자가 연주한 거의 그대로를 재현해 냈다. 물론 필자는 어떤 과정을 통해 녹음과 재생이 되는 지를 알기에 방금 ‘거의 그대로’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것을 몰랐다면 ‘완벽히 똑같이 재현해 냈다’라고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 연결을 통해 뉴욕 카네기홀, 베를린 필하모니 등 지구 반대편에서 콘서트가 열려도 스타인웨이앤드선스의 스피리오 모델이 있으면, 집 거실에서도 눈앞에서 악기가 라이브로 연주해내는 모습을 보고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필자도 이 스피리오 녹음을 서울에서 했는데 프랑스 파리 및 독일 함부르크의 스타인웨이앤드선스 쇼룸을 연이어 방문해 재생했을 때도 그대로 연주가 재현돼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아직 기술적인 한계도 있다. 같은 피아노라도 악기마다 서로 다른 터치 및 소리의 느낌이 있다. 그리고 악기가 놓여 있는 공간 울림의 조건에서 인간이라면 충분히 인식하고 조절해 냈을 섬세한 제어 능력 등 인간 특유의 매번 달라지는 감정의 즉흥적인 표현은 아직 불가능하다.
그렇다. 바로 이 매번 달라지는 상황을 인식하고 또 경험에 따라 시간에 따라 각기 달라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즉흥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아직 그 어떤 최신 AI 기술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능력에도 진보하는 기술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도전하는 중이다.
그중에 눈여겨볼 만한 것이 바로 AI 피아니스트인 ‘비르투오조넷(VirtuosoNet)’이다. 비르투오조넷은 남주한 카이스트(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를 필두로 정다샘 서강대 아트앤테크놀로지학과 교수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악보에 적힌 템포, 셈여림, 음길이, 페달 등을 인식하고 이것을 인간이 감정을 갖고 표현했을 법한 값을 데이터로 도출해 자동연주피아노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피아노는 이 신호를 통해 자연스러운 연주를 선보인다. AI 기술의 특성상 될 수 있는 대로 인간의 다양한 연주 샘플을 프로그램에 인식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AI 연주의 다양성이 증대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 대로 타인도 아닌 본인이 자기 감정도 이해하지 못해 어디론가 튈지 모르는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인간 능력을 AI 기술도 똑같이 해낼 날이 올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물론 기술은 앞으로 더욱 진보해 언젠간 우리 인간이 도저히 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또 정말 즐길 수 있을 수준의 음악 연주 프로그램이 개발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던져 본다. 왜 이 기술이 우리 인간에게 특히 예술, 음악에서 필요한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 나아가 예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존재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것은 객관식의 간단한 질문이 아닌 우리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면서부터 던져왔던 것이다. 이 정답 없는 질문에 정답 없는 대답들이 쌓여가며 예술을 향한 인간의 히스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것이 또 인간의 영감을 자극해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을 통해 깊이 있는 표현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진보하는 기술과 인간 삶이 조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지금껏 인류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는 요즘일수록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 초 스피리오로 녹음을 마친 후 독일 베를린에 출장 갈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 유명 사설 갤러리의 전시회를 방문했다. 전시회에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한 조각 작품이 있었는데, 제목이 ‘Ghost(유령)’였다.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조각상의 받침대를 이루는 석조물 외에는 정작 아무것도 필자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옆에 제목이 붙어 있는 푯말과 함께 표기된 가격 또한 놀라웠는데 한화로 거의 7000만원에 육박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어, 다시 조각상을 보니 정말로 필자 눈에는 조각상 받침대의 작은 돌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받침대 위에 어떤 조각상이 서 있는 건지 상상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예술을 기억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잊힐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불명확성이라는 기억의 모든 범위를 창작에 담길 원한다는 이 작가의 히스토리를 알고 나서 작품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작품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한 예술에 도달하기까지 인간이 지나온 길, 바로 이 예술을 향한 인간의 수많은 질문이 만들어 낸 히스토리를 AI가 복제할 수 있을까? 그 점에서 필자는 고개가 바로 끄덕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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