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66>] 우리의 삶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수업
‘중급 한국어’는 한국어 교재가 아니라 2023년 한국에서 출판된 장편소설의 제목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인 2020년에 작가는 ‘초급 한국어’를 출간했다. 역시 한국어 교재가 아니라 장편소설이다. 두 책은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교재가 아닌 만큼 초급을 읽지 않는 것이 중급을 읽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주인공, 시간대의 연속성을 고려한다면 초급에 이어 중급을 읽는 편이 확실히 그 이해와 재미의 정도를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초급 한국어’는 뉴욕의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감정교육’을 통해 그려낸 주인공처럼 모든 것이 될 수 있었으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이 소설은 삶을 쓰기 위해 그 삶에 밀착하는 대신 한국어라는 표현물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원거리 방식을 택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은 한국어 그 자체를 낯설게 보도록 하고, 낯설어진 한국어의 수면에는 우리 자신의 무의식이 비친다. 이를테면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인사는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안녕하세요?=Are you in peace?=당신은 평화 속에 있습니까?’ 우리는 왜 서로의 안녕에 집착할까. 그는 왜 이토록 안녕하지 못할까.
‘중급 한국어’는 뉴욕에서 자리 잡는 데 실패한 주인공이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시간 강사로 일하며 문학 수업을 하는 이야기다. 한국어 수업도 아니면서 왜 제목이 중급 한국어인지 묻고 싶은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의 ‘헌사 페이지’에 적혀 있다. “나의 첫 외국어, 채윤에게.” 채윤은 이 책의 저자인 문지혁 작가의 딸이다. ‘초급 한국어’가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수업이라면 ‘중급 한국어’는 이제 세상에 온 아이들의 언어를 배우는 부모를 위한 한국어 수업이라고 할 만하다. 그들은 물론 한국어 수업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자신과 조금도 문화를 공유한 적 없는 새로운 존재와 소통하기 위해 보내는 모든 시간이 그들에게는 초급보다 어려운 한국어 수업이다.
물론 이 수업은 언어 수업만은 아니다. 아이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배워 왔던, 따라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인 탓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의 가치는 언제나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에 있다. 알고 있었던 것의 의미를 다르게 깨닫게 되는 것. 그럼으로써 다면체로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 ‘중급 한국어’가 주인공의 결혼, 육아, 일로 점철된 일상과 그의 한 학기 문학 수업을 병치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학의 목적은 언제나 발견이 아니라 재발견이니까. ‘중급 한국어’ 수업이란 결국 문학 수업에 다름 아니다.
삶의 재발견이란 구체적으로 단어의 재발견을 통해 가능하다. ‘초급 한국어’는 주인공이 잃어버린 단어에 대해 암시하며 끝난다. 엄마의 죽음과 함께 그에게서는 엄마라는 단어 하나가 사라진다. ‘중급 한국어’의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단어 하나가 생겼다는 내용이다. 이때 새로운 단어란 곧 태어날 둘째 아이를 일컫는다. 우리 삶은 끝없이 되풀이되는 수업과도 같다. 처음에 그 수업은 외국어 수업과도 같다. 정해진 규칙을 배우고, 그런 다음엔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용례들을 배운다. 어른이 되기 전 우리 삶의 수업을 대체로 이와 같은 외국어 수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은 되고 무엇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실하게 외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단계를 마치고 나면 이어지는 것은 문학 수업과도 같다. 일단 이 수업에서는 정답이 없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나오는 바람둥이 주인공 구로프는 누군가에겐 인간쓰레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세기의 사랑꾼일 수도 있다. 그가 도착한 사랑은 사랑의 완성일 수도 있지만 사랑의 실패일 수도 있다.
문학 수업을 통해 우리는 주어진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배운다. 어른의 삶도 그와 같다. 문제는 깊은 시선의 힘이다. 잃어버린 단어와 태어난 단어의 역사를 성실하게 수집할 때,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사전을 가진 자기 인생의 프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lus Point
문지혁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초급 한국어’ ‘비블리온’ ‘P의 도시’,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사자와의 이틀 밤’ 등을 썼고 ‘라이팅 픽션’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글쓰기와 소설 창작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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