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FT 선정 베스트셀러 ‘더 박스’ 저자 마크 레빈슨 | “공산품 거래 중심 세계화 끝났다…아이디어 확산 중심으로 변화”
“과거의 세계화는 ‘형태가 있는 상품의 이동’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이제는 아이디어 등 ‘무형의 이동’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마크 레빈슨(Marc Levinson)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 경제 에디터는 최근 인터뷰에서 “세계화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레빈슨 전 에디터는 비즈니스위크,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이 선정한 2006년 최고의 비즈니스 서적 ‘더 박스(The Box)’의 저자이자 경제학자다. 4월 28일 국내에 출간한 신간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통해 세계화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미·중 외교 관계의 악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전부터 세계화가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수년간 세계 각국은 무역정책을 결정할 때 ‘지정학적 요인’을 더 고려하기 시작했다”며 “세계화 자체가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공산품 이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활발히 이뤄진 국제무역의 수혜로 성장한 우리나라는 최근 변화한 국제 질서 속에서 4월까지 14개월 연속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이다. 레빈슨은 “상품 무역 성장의 둔화 속 미·중 갈등 심화로 한국이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이어 “한국은 지역 무역협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 때”라며 “제조업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아이디어 개발이 더 중요해진 만큼, 글로벌 아이디어 경쟁에 대한 준비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신간에서 세계화의 진화 과정을 다뤘다. 과거 세계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이 이해하는 세계화는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국제무역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한다. 이런 형태의 세계화에서는 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이 추가 가공을 위해 다른 국가로 보내지는 ‘중간재 무역’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1980년대 이후 상품 무역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컨테이너 운송으로 상품을 이동하는 비용이 절감되고, PC 보급으로 원거리에서도 복잡한 공급망을 잘 관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제조 업체와 소매 업체는 생산 공정을 세분화해 각 단계를 가장 저렴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업들은 생산과 운송 비용을 중심으로 계산해 생산 장소를 결정했고, 리스크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복잡한 공급망에 리스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특히 단일 공급 업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제품 공급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기업들은 리스크에 주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이 바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부터다.”
현재의 세계화는 무엇이 다른가.
“현재는 무역정책에서 지정학적인 요인이 더 많이 고려되고 있다. 이는 세계 각국 정부가 특정 유형의 제품에 대해 ‘국내 생산’이나 ‘특정 국가와 거래 금지’ 등을 추진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첨단 반도체와 전기자동차가 대표적인 예다. 과거에 시장이 수입과 외국인직접투자(FDI)에 더 개방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하지만 국내 정치적 통제가 적용되는 제품은 한정돼 있다. 각국 정부는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와 무역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국제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공급망은 정부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쉽게 말해 특정 유형의 반도체를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반도체에 들어가는 수천 개의 부품을 모두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책에서 언급한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는 무엇인가.
“이전까지 세계화가 형태가 있는 상품의 이동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제는 아이디어 등 ‘무형 상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 관계가 악화하기 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상품 무역의 성장은 둔화하고 있다. 세계 인구 증가세의 둔화, 고령화의 가속화 등이 그 이유다. 고령층은 여행, 의료, 외식 등 서비스에 더 많은 소득을 지출하고 실물 상품에 대한 지출 비중을 줄인다. 기술 발전도 상품 무역을 감소시켰다. (첨단 장비와 관련해) 새로운 하드웨어를 구입하지 않아도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수 있어 기업들이 장비를 교체하는 주기가 길어졌다. 일부 상품은 사라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부품 수가 수천 개 적다. 기존 자동차 업계에서 엔진, 연료 분사기, 촉매 변환기 등의 수출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반면 국경을 넘나드는 ‘무형 상품의 교환’은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 미국, 유럽 등의 엔지니어들은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거나 제품을 개선할 방법을 고민하며 종일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이런 국제적 정보 이동은 세계 경제성장에 매우 중요하지만 일반적으로 무역 데이터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탈세계화’ 흐름과 미국의 세계경제 주도권 약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세계화가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우리가 알고 있던 형태의 세계화, 즉 공산품 이동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 시대는 끝났다고 본다.
또한 국제 질서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하고 있진 않다고 본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많은 국가가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 국가는 여전히 중국의 공격적인 행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이 후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과 중국의 정책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에서는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과거 세계화는 각국 중앙은행이 큰 어려움 없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줬다. 수입 경쟁이 활발해질수록 많은 종류의 상품 가격이 안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가 지났다. 중국은 더 이상 제조 비용이 저렴한 곳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상품 운송 비용도 상승했다. 미국 침실 가구를 예로 들어보자. 미국 시장에 중국산 가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2006년부터 2020년까지는 침실 가구의 소비자가격이 약 10% 하락했지만, 이제는 가격이 다시 비싸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국제무역의 급속한 성장은 한국 등 많은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국제무역이 느리게 확장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신세계화가 한국에는 기회가 될까, 위기가 될까.
“분명한 것은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난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다른 무역 파트너들과 마찰이 있을 수도 있다. 한국은 현재 세계무역기구(WTO)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열의를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이 여러 지역 무역협정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제조업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아이디어 개발이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한국이 이런 세상에서 번영할 준비가 돼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은 고학력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글로벌 경쟁을 할 준비가 돼 있는가. 정부도 이런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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