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로이어 | 학교에 불낸 혐의 구속 교사 구해낸 법무법인 대륙아주] “검찰 과학수사 감정서 증거 사용 안 돼”…이례적 부정 판결
과학수사 기법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최근 영구 미제로 남을 뻔했던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 살인사건도 21년 만에 과학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당시 범행에 사용된 차량에서 나온 마스크에서 DNA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충북 소재 불법 게임장에 남겨진 유전자와 일치한다는 게 확인되며 범인을 검거하게 됐다.
이처럼 과학수사가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는 사례가 늘자, 증거나 감정서 등이 맹목적 신뢰를 받는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서울 은평구 은명초등학교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1심 재판에서도 대검찰청 소속 과학수사원이 작성한 감정서가 유죄의 증거로 쓰였다. 재판부는 화재를 낸 것으로 의심받던 A씨에게 금고 10개월을 선고하고 법정에서 구속했다. 중실화죄(重失火罪)에서 실형을 선고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A씨는 갑작스레 구속되면서 한순간에 직장을 잃을 처지에 놓였고, 가정에도 불화가 생길 위기에 처했다.
A씨의 대리를 맡은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정성태(사법연수원 22기)·김서형(사법연수원 45기) 변호사는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법정 구속까지 됐던 A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수사 주체가 작성한 감정서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수사기관 감정서의 증거 능력을 부정한 최초의 사례다.
검찰 ‘화재 분석 감정서’ 유죄 증거 채택…A씨 금고 10개월 유죄
이번 사건은 2019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과 후 수업이 진행되고 있던 오후 4시쯤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발생한 불이 은명초등학교 별관 전체로 옮겨붙었고, 약 3분 만에 건물이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7억원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으며 교내에서 방과 후 학습 중이던 학생과 교사, 병설유치원 학생과 교사 등 158명이 대피했다.
검찰은 교사 A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중실화 혐의로 기소했다. 중실화죄는 업무상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로 인해 공용 건조물이나 타인의 물건 등을 불에 태워 훼손한 사람에 대해 최고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는 범죄다.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폐쇄회로(CC)TV 영상에는 A씨가 화재가 발생한 분리수거장에 들어간 뒤 1분 42초 후 나와서 동료 교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이 담겼다. A씨가 분리수거장에서 나온 시점으로부터 약 5분 22초 후 벽면 상단부에 연기가 확인되고, 그로부터 22초 후에는 불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대 화재감식팀과 서울소방재난본부,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화재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현장을 조사했다. 조사 당시 분리수거장의 전원 배선은 화염에 녹은 상태였고, 단락흔(短絡痕) 등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라고 볼 수 있는 특이점은 없었다.
검찰은 대검찰청 법화학분석과 화재수사팀에서 근무하는 B씨가 작성한 ‘화재 사건 감정 결과 통보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이 감정서에는 담배꽁초의 훈소가 유염 연소로 전이돼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검찰은 또 화재 조사 당시 전선 잔해가 전원플러그 미체결 상태로 발견된 점, 배선과 기기 잔해에 단락흔 등 발화와 연관 지을 만한 전기적 특이점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A씨의 유죄를 주장했다.
1심은 화재가 담배꽁초로 인해 발생했다고 봤으며 발화 원인 제공자로 A씨를 지목했다. CCTV상으로 분리수거장을 드나든 사람은 청소반장과 학생 2명뿐이고, 연기가 식별된 사이 A씨 외 다른 사람이 분리수거장에 출입한 적이 없다는 점 등이 유죄의 증거였다. 재판부는 “이번 화재는 담배꽁초의 훈소가 유염 연소로 전이돼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전기적 요인 등 비인위적 요인은 배제할 수 있다”며 A씨에게 금고 10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대륙아주 “수사기관 감정서 증거 능력 없다”…담뱃불 화재 논문까지 찾아 분석
A씨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금고형이 확정되면 교사인 A씨는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중징계 중 파면에 해당하는 당연퇴직 처분을 받게 된다. 국가공무원법 제69조는 금고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당연퇴직 처리한다. 파면 처분을 받으면 연금과 퇴직수당을 50%만 받을 수 있다. 이번 화재로 학교 등 시설물에 20억원 이상의 재산 피해가 발생해 국가가 구상권을 청구할 가능성도 있었다.
대륙아주는 1심 판단의 주요 근거인 검찰 감정서의 증거 능력과 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법정에서 증인 신문을 받은 B씨 증언의 증명력을 배척하는 전략을 택했다. 김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작성한 감정서는 피고인이 부동의한 이상 증거 능력이 없다”며 “검찰 수사관으로 수사에 참여한 B씨에게 중립적인 진술을 기대하기 어렵고, 수사 기록을 사전에 모두 검토한 후 증언한 진술의 객관성, 신빙성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륙아주는 또 이 감정서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원인 조사 결과를 서류로 파악한 후 검찰 내부적으로 보고한 ‘수사보고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제3의 기관이나 법원의 공판 절차 과정에서 감정이 이뤄져야 하는데, 수사 주체가 만든 감정서는 객관성이 없다는 취지다. 김 변호사는 “A씨를 수사하고 기소한 주체가 ‘이 사람은 유죄야’라는 취지의 증거를 만들어 냈고, 1심은 이를 유죄의 증거로 보고 금고형을 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륙아주는 제연공학과 연소공학, 소방학 논문을 분석한 결과 발화 원인을 담배꽁초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담뱃불과 같이 불꽃이 없는 무염화원으로 화재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미소화원과 함께 인접한 위치에 가연물이 존재하고, 충분한 산소가 공급돼 가연물의 온도를 착화점 이상으로 높일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충족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소화종 중 담뱃불 발화에 관한 연구’ 논문을 인용해 담뱃불 화재 현장에서의 감식 유의 사항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는 ‘담뱃불을 발화원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현장 감식에서 출화개소(발화장소), 가연물의 인접성, 착화물의 연소가 화재로 이어지는 화염의 경로 등이 확인돼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를 근거로 대륙아주는 담뱃불 화재로 판단하기 위한 일반적 요건이나 필수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상당 부분 규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당시 감식 보고서는 현장에서 수거된 4점의 전기제품(배선, 형광등, 선풍기 모터, 환풍기 모터)만 대상으로 했다”며 “화재 현장에 있던 전기물 전부를 감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기적 원인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이 배제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항소심은 1심 판단을 뒤집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찰의 감정서는 수사기관 내부의 단순한 의견 표시에 불과하므로 증거 능력이 없다”며 “조사 현장에서 담배꽁초 잔해들이 발견됐다는 사정은 이번 화재의 원인이 된 미소화원이 담배꽁초라는 점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이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결국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법원이 수사기관 감정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후 단 한 건의 사례도 없다. 그만큼 이례적인 승소 건이다.
김 변호사는 “피고인이 배제된 상태에서 수사 주체가 작성한 자료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부당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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