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21>] 자본주의의 화폐적 토대 만든 스페인 골드
4월 1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하면서 동반자 관계 강화를 약속했다. 룰라 대통령은 국제 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자고 제안하면서 “왜 우리는 자국 통화로 무역을 할 수 없는가? 금본위제가 사라진 뒤 달러를 국제결제 화폐로 정한 것은 누구인가?”라며 달러 중심의 국제통화 시스템에 반감을 표시했다. 중국과 브라질은 양국 간 무역 거래에서 자국 통화인 위안화와 헤알화를 쓰기로 합의했으며 달러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 대신 위안화 지급 시스템인 칩스(CIPS)를 이용하기로 했다.
룰라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현대적 화폐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본위제를 이해해야 하고, 금본위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이 말했듯이 ‘장기적 시계(Longue durée)’를 갖고 유럽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스페인의 멕시코 정복
1519년 스페인과 멕시코(아즈텍)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아즈텍 황제인 목테주마의 죽음, 수도인 테노치티틀란의 함락과 함께 비교적 짧게 끝났다. 전쟁에 참여한 스페인 병사 몇 명이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 원주민은 천연두 바이러스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유입된 새로운 질병이 아니었더라면 전쟁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 포로와 노예가 된 수백만 명의 원주민은 금광과 은광에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많은 원주민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고, 낙석과 매몰 사고를 당했으며, 금과 은의 정제 과정에서 사용된 수은에 중독됐다. 한때 신대륙 인구의 90%가 감소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행한 제노사이드(대량 학살) 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1986)’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악명 높은 노예 사냥꾼 멘도자(로버트 드니로 분)가 질투심에 불타 동생을 죽이고, 극도의 고행과 회개를 통해 가톨릭 사제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스토리 라인이 주로 멘도자의 내적 갈등과 자기 연민에 집중되다 보니, 유럽인의 원주민 학살, 지옥 같은 노예노동은 주로 엔니오 모리코네의 서정적 음악을 장식하는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와 동일한 전략을 이용해 신대륙을 침략했다. 즉 이들은 외국 땅을 침략해 상대방 군대를 파괴한 뒤, 포로와 노예를 포획해 광산에서 일하도록 하고, 광산에서 생산된 귀금속으로 주화를 만들어 원정 비용을 조달했으며, 식민지인들에게 주화 형태의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주화의 유통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식민지 경제를 종속시켰다. 다만 스페인의 약탈 규모는 그리스·로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스페인은 그 당시 유럽 전체가 보유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귀금속을 남미에서 수탈했다. 1500~1800년 남미에서는 2800t의 금과 15만t의 은이 생산됐다. 이것은 당시 전 세계 금 공급량의 70%, 은 공급량의 85%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페루의 세로리코에서만 약 4만5000t의 은이 채굴됐는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군대 전체에 수백 년 동안 급료로 지불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에서는 15만 명의 노예가 동원돼 연간 16t 이상의 금이 생산됐다. 높은 사망률로 현지인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유럽인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했다. 이때부터 아프리카는 세계화된 노예무역의 하부 구조를 형성하게 됐다.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세바스치앙 살가두는 ‘금광’이라는 사진 연작을 통해 남미의 끔찍한 광산 현장을 세상에 알렸다.
유럽의 가격 혁명
스페인과 그리스·로마의 또 다른 차이점은 식민지 사업을 민영화했다는 점이다. 정복자들은 개인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사병을 모집하여 정복 사업을 펼쳤으며, 정복 사업이 성공한 이후에는 투자자들에게 전리품을 분배했다. 탐험이 성공하면 국왕은 정복지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했고, 식민지의 물건에 대해 퀸토헤알, 즉 금액에 상관 없이 5분의 1을 세금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퀸토헤알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세금이 부과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민간 정복자는 거의 돈을 벌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적자 상태에 빠졌지만, 돈맛과 피 맛을 본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끝없는 경쟁의 나락으로 빠졌다. 결국 가장 악랄한 정복자였던 에르난 코르테스조차 파산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심장인 주식회사의 운영 방식과 매우 유사하며, 특히 극도의 위험과 수익을 추구하는 벤처기업과 닮아 있다.
하지만 스페인과 그리스·로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유럽 사회에서 돈의 힘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Achsenzeit·고대)에는 돈(귀금속)이 주로 군사적 도구로만 사용됐지만, 이제 돈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 움직이는 자생적 지배력을 갖게 됐다. 르네상스 시대에 발생한 거대한 사고의 전환이 돈의 지위를 변화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고의 전환은 수학, 과학의 발전과 관련돼 있다. 신대륙에서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스페인으로 유입됐지만 곧바로 유럽 전역으로 분산됐다. 유럽 내에서 엄청난 양의 돈이 상품과 서비스를 따라다니면서 전방위적으로 가격을 끌어올렸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가격 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가격 혁명과 함께 돈은 또 다른 형태의 역동성을 보여주었다. 돈은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든 흘러 다녔다. 스페인이 남미에서 약탈한 그 많은 보물이 다 어디로 갔는지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볼 수 있듯이 보물 중 일부는 해적들에게 빼앗겼고, 일부는 네덜란드와 영국 해군에게 약탈당했으며, 일부는 풍랑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스페인이 남미에서 약탈한 보물의 대부분은 정당한 경로를 따라 스페인을 떠났다. 볼테르가 지적했듯이 스페인 귀금속의 대부분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그중 일부는 향신료, 초석, 설탕, 차, 다이아몬드 및 원숭이를 사기 위해 동인도로 향했다. 스페인 내에서 상품 가격이 부풀어 올랐다는 것(인플레이션)은 스페인 상품이 외국 상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비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시대에나 국가의 부는 일부 특권층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당시 스페인의 지배층은 자신들에게 집중된 금과 은을 가지고 궁전, 마차, 가구를 도금하는 데 썼다. 16세기 중반이 되자 스페인은 순 채무국이 됐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로부터 20%에 가까운 높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야만 했다. 남미의 귀금속 출하량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1550~1700년 스페인은 14번이나 국가채무를 불이행했다(국가부도). 1588년 스페인은 영국이 보유한 금이 탐나서 값비싼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지만, 무적함대의 괴멸과 함께 처참하게 몰락했다. 물론 스페인의 몰락에는 왕실과 지배계급의 가톨릭 교조주의도 큰 역할을 했다. 유능한 금융가, 기술자였던 유대인과 신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거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유럽은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했다. 하지만 유럽 내 광물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화폐가 경제 발전을 제약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곤 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남미에서 수탈한 금과 은이 유럽 사회에 널리 퍼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는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화폐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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