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세상만사 <3>] 녹색경제를 바라보는 EU의 고민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2023. 5. 15.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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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U 집행위원회

3월 16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넷 제로 산업법(Net-Zero Industry Act)’ 초안을 발표했다. EU는 2019년 12월, 2050년까지 넷 제로(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흡수량도 늘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늘어나지 않는 상태) 달성을 선언하면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들과 목표를 규정한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에 발표한 넷 제로 산업법안은 앞서 발표한 유럽 그린딜을 구체화하기 위한 입법 과정의 일환이며, ‘유럽 핵심 원자재법(European Critical Raw Materials)’ 초안과 함께 공개됐다.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공학박사, 전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EU, 넷 제로 산업법안 발표

넷 제로 산업법안의 핵심은 2030년까지 EU가 기후 및 에너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각종 녹색 제품의 최소 40%는 EU 역내에서 생산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다. 넷 제로 산업법안은 이를 위해 관련 기술의 개발과 관련한 규제를 단순화하고, 실험실 차원의 기술을 양산으로 이행하기 위한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EU의 녹색기술 경쟁력과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넷 제로 산업법안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태양광 및 태양열 △바이오 가스 △히트펌프 및 지열 △수전해 수소 및 연료전지 △이차전지 △풍력발전 △전력망 △CCS(이산화탄소 포집 및 저장) 등 8개의 기술을 전략적 기술로 지정하고 있다.

EU의 전망에 따르면 이러한 녹색기술에 대한 EU 내 수요는 2030년까지 현재에 비해 약 3배 이상 규모로 확대될 것이며, 세계적으로는 연간 약 6000억유로(약 883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된다.

넷 제로 산업법안은 단순히 녹색기술개발을 지원하는 데서 탈피해 해당 기술에 기반한 EU 내 관련 산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는 것과 더불어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녹색기술 및 녹색산업 분야에서의 경쟁력은 압도적이다. 세계 태양광 패널 및 관련 부품의 90% 이상은 중국이 독점하고 있으며, 전기차와 이차전지 등에서도 중국의 점유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넷 제로 달성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련 생산 설비 투자의 90%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EU로서는 넷 제로 달성을 위한 예산과 투자를 확대할수록 중국 업체들의 성장을 지원해 준다는 딜레마에 빠져있는 것이다.

EU의 예산이 투입되는 태양광발전소 등 재생에너지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최저가 낙찰제를 적용해 왔다. 제시된 성능 기준을 충족할 경우 제일 저렴한 가격을 제시한 기업이 낙찰받는 최저가 낙찰제의 경우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예상보다 빠른 탄소 배출 저감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물량을 저가로 입찰할 수 있는 중국 기업들의 독무대가 됐다.

EU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자 입찰에 있어서 가격 기준 이외에 환경 기준 등 비가격 요소를 최대 30%까지 반영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압도적인 가격경쟁력을 갖춘 태양광 패널 등의 경우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넷 제로 산업법안은 특정 공급원이 특정 기술 기반 제품에 대해 65% 이상 비율을 점유할 경우 이를 배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정 국가의 기업이라는 이유로 조달과 입찰에서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국제무역 질서에 위반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EU는 이에 대해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정부조달협정(GPA)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억지스러워 보이는 이러한 조항이 포함된 것은 EU의 초조함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EU는 최근 역내 첨단산업과 녹색산업이 미국과 중국의 대규모 보조금과 각종 지원 정책으로 인해 해외로 이전하거나 경쟁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EU 입장에서 보자면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와 지원이 결과적으로 중국의 기술적 도약을 뒷받침했을 뿐 EU가 산업이나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1980년대 일본 기업의 대대적인 진출로 인한 제조업 쇠퇴와 붕괴를 다시 한번 반복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녹색산업 의존도 낮춘다

EU 내부적으로는 최근 녹색산업에 대한 그동안의 지원이 과연 어떤 효과를 거뒀는지를 둘러싼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EU는 출범 이후 존재감을 인식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에너지 시장의 개편을 통한 소비자의 비용 절감과 더불어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제시해 왔다. 기후변화 대응은 공동체로서 존속하기 위한 공통의 가치로 기능해 왔으며, 미래 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지난 20년간 EU 차원의 대규모 지원과 투자를 진행해 왔으며, 많은 보조금을 투입했지만 기대했던 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태양광은 한참 전에 중국 기업들의 독무대가 됐고 최근 들어서는 풍력마저 중국 기업의 기술력 상승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보조금 지급을 통해 기술개발과 실용화 단계까지는 앞서 나갔지만, EU 기업들의 양산 기술 부족과 더불어 EU 차원의 종합적 지원 체계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그나마 경쟁력을 갖추고 있던 기존 산업이 취약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전환과 더불어 화석연료에 기반한 산업구조를 전환해야 했지만,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존 산업은 점차 축소되는데 이를 대체할 미래 산업은 EU 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전기차 분야를 꼽을 수 있다. 많은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지만 정작 EU의 전기차 시장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중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 역시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 후반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관련 산업이 새로운 일자리와 미국의 산업경쟁력 강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세금 공제를 포함한 각종 인센티브 부여와 대출 보증 등을 통해 솔린드라(Solyndra)를 비롯한 많은 태양광 업체가 등장했지만, 중국과 경쟁에 밀려 지금까지 생존한 업체는 거의 없다. 물론 미국 정부도 중국산 태양광 패널에 대한 관세 인상 등을 통해 자국 업체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몰락한 산업을 되살리기에는 한발 늦었다.

EU의 넷 제로 산업법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시장 접근을 차단하거나 억제함으로써 한국 기업에는 일시적인 기회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 접근과 연계된 역내 투자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결과적으로는 국내 산업의 공동화를 가속화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과 EU의 변화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세계화 이후의 새로운 질서 형성 과정으로 이해하고 최선의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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