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까마귀 떼가 달려들었다. 누구도 까마귀 떼를 쫓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태풍이 왔다. 살아서 헐벗었던 삶, 죽어서 새에게 뜯기면서 썩어간 주검들은 넘치는 빗물에 쓸려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소설가 한수산이 장편소설 ‘까마귀’에서 묘사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삶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1944년 일본 나가사키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가 이듬해 원폭에 희생된 이들은 검은 재로 남았다. 이들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로하는 위령비가 경상남도 합천에 있다.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경남 합천.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성과로 양국이 40억엔씩을 출연해 이 도시에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지었다. 복지회관 뒤편엔 원폭피해자를 돕는 일본 시민단체 태양회의 다카하시 고오준 이사장이 세운 위령비도 있다. 거기엔 우리 정부조차 외면했던 한국인 피폭자의 역사가 일본인에 의해 고스란히 기록돼있다.
험준한 가야산에 둘러싸여 농사로 연명했던 합천에서는 1930년대부터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간 이들이 많았다. 돈벌이를 찾아 자발적으로 건너간 빈농들도 있고 강제징용에 끌려가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노역에 시달린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통계에 따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자 74만명 중 한국인은 10만명에 달했고, 그중 70% 이상이 합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45년 피폭 당시 히로시마엔 한국인이 6만명이나 살고 있었는데 그중 절반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고통을 안고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지만 가난과 질병 속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견뎌야만 했다.
19일 히로시마를 방문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 공원에 있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한다. 두 정상이 히로시마 위령비에 나란히 서서 한국인 피해자들의 넋을 기릴 때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에서도 눈물 흘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사죄다. 마이크 앞의 어떤 말보다 강한 행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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