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철 칼럼] 엄혹한 외교현실과 ‘나태한 몽상들’
신냉전ㆍ북핵 등 미증유 도전으로 증폭
상황 불가피성ㆍ절박성 따른 대외정책
현실 외면 ‘이상론’ 내세워 흔들기 한심
‘윤석열 외교’에 대한 비판 가운데 가장 솔깃할 만한 건 “왜 미국에 ‘몰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 등을 적으로 돌리느냐”는 식의 얘기일 것이다. 또 일본에 관해선 “과거사 사과나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 책임에 면죄부까지 준 건 잘못 아니냐”는 주장도 꽤 많은 공감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정상회담 때 발표된 상호 투자액수를 단순 비교해 ‘퍼주기 외교’를 했다는 알 만한 학자도 있다.
야당은 이런 비판을 한편으로 생산하고, 다른 한편에선 편승하기도 하면서 현 정부 외교를 ‘굴욕외교’ 또는 ‘호갱외교’라며 거세게 흔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지금 우리가 마주한 엄혹한 외교현실의 본질을 간과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게 문제다.
지금 우리 외교에 닥친 핵심 도전은 ‘신냉전’과 ‘공급망’, 그리고 ‘북핵’이다. 신냉전도 그렇고 북핵도 그렇고, 적잖이 들어본 말들이라 새삼 경각심을 일으키기보다 그저 그러려니 여기는 타성까지 생겼을 만한 얘기들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전과는 차원이 크게 다르다.
우선 신냉전은 이제 말 그대로 사실상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됐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전쟁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 다수가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국제전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없지 않게 됐다. 날로 격화하는 미중 대립은 우리에게 더 심각하다. 과거 미중 갈등은 주로 무역 분야에서 빚어졌고, 중국 정상이 방미해 보잉사 여객기 몇 백 대 사 주면 대충 넘어가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과 미국의 세계전략이 본격 충돌함에 따라 패권을 의식한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통해 중국 경제와 첨단 기술개발을 사실상 봉쇄하는 ‘경제 전면전’ 양상이 됐다. 대만해협 긴장은 덤이다. 중국의 반격 또한 치열하다. 러시아와 중동, 남미의 생산국들을 적극 포섭해 석유·가스 국제결제를 달러 중심의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 중국 주도의 ‘국경 간 위안화지급시스템(CIPS)’으로 대체하려는 ‘통화 전쟁’을 전개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달러체제에 대한 공격은 미국의 근간에 대한 위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중러와 미국 동맹 간의 대립은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주축국과 연합국, 냉전기의 동서 대립을 방불케 하는 철저한 ‘적과 동지의 질서'로 급격히 재편되는 상황이다. 싫든 좋든, 중국의 위협을 실감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경제·안보를 포괄하는 자국 동맹에 남을 건지, 중국 편에 설 건지에 대해 분명한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북핵도 이젠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도전이 됐다. 북한은 2017년 이미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조만간 7차 핵실험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7차 핵실험은 직경 60㎝에 이른 것으로 알려진 북한 핵탄두의 추가 소형화, 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탑재를 위한 수소탄 소형화 검증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분석된다. 7차 핵실험이 핵분열탄 탄두 직경을 30~40㎝로 추가 소형화해 소형 SLBM 등 전술 투발수단에 장착할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건, 북한이 전략적 핵보복에 대한 부담 없이 전술핵을 사용하는 국지전 도발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우리로선 새로운 대응체계 강구가 절박해진 상황이다.
외교정책에도 치열한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정부의 대미·대일 외교를 올바로 비판하려면 우선 우리에게 닥친 시급하고 현실적인 경제·안보 도전의 실체를 먼저 직시하고 숙고해야 한다.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이 ‘굴욕외교’ 타령이나 ‘죽창가’ 수준에 머물러서는 정확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뜻이 아무리 좋아도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외교로 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몽상이다. ‘문재인 외교’가 그랬다.
장인철 수석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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