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진즉 내정하고도, 동북아위원장 찾느라 한 달 고생
정태인비서관 진즉 내정하고도
동북아위원장 찾느라 한달 고생
노 대통령 “사공일 같은 이를…”
기업인 여럿 추천받아 면접까지
한 괜찮은 후보 미국 국적에 낙마
부동산 15건 소유해 후보서 제외
전국에 부동산 50건 가진 위원도
박성용·배순훈·서두칠 최종 검토
박성용 고령, 서두칠 현직 CEO
산고 끝에 “배순훈으로 갑시다”
참여정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에 비유할만한 12대 국정과제위원회가 맹활약했는데, 그 선발주자는 정부혁신위원회와 균형발전위원회였다. 전자는 김병준 교수, 후자는 성경륭 교수가 위원장을 맡아 척척 노를 저어나갔다. 두 교수는 대선 때 노무현 후보를 도왔고 인수위에서도 활동했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4월9일 대통령이 두 위원회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오찬을 함께 했다. 그러나 동북아지역 평화와 물류 및 금융허브 구축, 외국인투자 유치를 맡을 동북아시대위원회는 위원회 명칭부터 시비가 됐다. 중국이 ‘동북아중심국가’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대신 ‘동북아경제중심’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위원장 인선도 난산이었다. 3월 중순 위원장을 찾기 시작해 꼬박 한달이 걸렸다. 교훈으로 삼기 위해 그 과정을 기록해둔다.
3월15일(토) 인수위에 참가했던 아무개 교수를 동북아위원장으로 추천했더니 노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5공, 6공 때 경제수석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사공일 같은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틀 뒤 수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동북아위원장은 세계적 안목을 가진 기업가 출신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뒤 여러 사람에게서 참 많은 후보를 추천받았고,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본 이도 여럿이었다.(물론 동북아위원장 면접이라는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추천된 후보 중에는 기업가가 많았다. 27일 오후 몇몇 기업가 후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탐탁치 않은 눈치였다. 의논을 마치고 대통령 집무실을 나오는데 양길승 부속실장이 대통령에게 “관저에서 ‘영식’(아드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영식이라 부르지 말고 건호라 부르세요”라고 했다. 격식과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노무현다운 반응이었다.
3월 말께 동북아위 비서관으로 인수위 경제1분과에서 같이 활동했던 정태인 위원을 추천했다. 정 위원이 5년간 동북아 문제를 연구했으며 인수위 때도 이 사안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실 정태인은 누구보다 먼저 정치인 노무현이 흙 속의 진주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한국 정치의 미래 희망을 걸었던 사람이다. 경제 가정교사에 방송출연 때 코치 노릇까지 하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 대통령을 도운 이유다. 여기에 전문성까지 갖췄으니 바로 동북아비서관으로 결정됐다.
문제는 위원장이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은 김재철 무역협회장을, 김진표 부총리와 권오규 수석은 현명관 삼성 부회장을, 나중에 동북아위원이 된 박학다식한 최명주 교수는 박성용 금호그룹 회장을 추천했다. 진대제 장관은 후보를 열명이나 추천했다.
4월 들어서는 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장이나 한국의 해외투자기업 사장 중에서 위원장 후보를 찾았다. 4월2일(수) 중국에 한국 공장을 서른개 이상 만들어 모두 성공시켰던 유능한 기업가를 만났다. 이 기업가는 중국의 공장 중 여럿이 한국 지방자치단체와 결연 사업을 벌였는데 기념사진만 찍고는 끝이더라고 했다. 다음 선거에 이용하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다니 참 한심한 일이었다. 이 기업가는 상당한 호감을 줬지만 민정수석실 검증 결과 국적이 미국이어서 포기했다.
몇몇 후보는 검증 과정에서 부동산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다른 조건은 다 좋은데 전국에 부동산 15건을 소유하고 있어 탈락한 이도 있었다(동북아위원 중에는 전국에 50건 넘는 부동산을 가진 교수도 있었으나 위원장이 아니어서 문제삼지 않았다). 대기업 사장을 역임한 또 다른 후보는 사장 시절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임원이 보고하러 사장실에 들어가니 사장이 벽에 걸린 전국지도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임원이 “무슨 사업구상이라도 하십니까?”라고 묻자 사장 왈 “아니, 전국에 있는 내 부동산을 보고 있는 중이야. 여기도 내땅, 저기도 내땅” 이러더란다. 단박에 탈락. 사익 추구에는 귀신이지만 공적인 일에는 부적격이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투기가 망국병에 이르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4월10일(목) 밤 9시 배순훈 옛 대우전자 사장, 정태인, 임원혁 박사와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배 사장은 첫인상이 겸손하고 ‘적당한’ 사람으로 보였다. 재주가 있어 보이고 말도 조용조용하게 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 기업들에 분식회계가 만연해 있는데, 일정 유예기간을 제시하고 그 뒤에는 엄벌해야 한다고 상당히 개혁적인 주장을 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좋은 기업을 넘어서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 2001)의 저자 짐 콜린스는 훌륭한 기업가의 최고 특징은 겸손이라고 했는데, 배 사장이 바로 그런 분으로 보였다.
이튿날 박성용 회장을 만나 식사를 했다. 박 회장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고 음악 꿈나무들의 후원자로 유명했다. 나도 클래식 듣기가 취미이기에 대화가 잘 됐다. 박 회장은 이날 작곡가 윤이상과 통영음악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윤이상 선생의 부인이 과거 한국 정부가 남편을 납치, 투옥했던 잘못을 사과하기 전에는 통영음악제 참석을 거부한다고 했다(이응로 화백과 윤이상 선생 등은 1967년 박정희, 김형욱이 유럽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한국 예술가들을 납치해와 간첩으로 몰고 가려다 유럽 각국의 항의를 받고 석방했던 용공조작 사건, 소위 동백림사건의 피해자다). 박 회장은 매우 훌륭했지만 연세가 좀 많았다.
이날 밤 8시반엔 농협과 대우, 한국전기초자를 거쳐 이스텔(Eastel)사를 이끌고 있던 서두칠 사장을 만났다. 노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라고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구제불능 적자기업 한국전기초자를 맡아 3년간 일요일과 공휴일, 명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6시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며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경북 구미 13평 아파트에 살면서 기사 없이 손수 운전했다. 그 성공담을 담은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2001년)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인세는 전액 사원들에게 줬다.
서 사장의 아버지 이야기도 들었다. 서 사장의 바로 위 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사망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다 나중에야 받았는데, 3분의 1은 사고 낸 자동차 운전사에게 주고, 3분의 1은 기부하고, 3분의 1만 받았다고 한다. 보기 드문 일이다. 서 사장의 인품과 태도가 부전자전인가 싶었다. 그는 시간이 없어 교회에 나가지 않고 골프도 치지 않는다고 했다. 밤늦게 임원혁 박사가 합류해 정태인 비서관과 셋이 의논한 끝에 위원장 후보 1번 배순훈, 2번 서두칠로 합의했다. 서 사장은 대단히 유능하지만 회사를 맡고 있어 위원장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4월15일(화) 저녁 노 대통령과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청와대 만찬이 있었다. 보고차 관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노 대통령이 만찬 후 걸어서 관저로 귀가했다. 대통령은 관저 앞마당에서 경호원과 대화를 나눴다. 그 경호원은 전두환 시절부터 근무했으며 백담사에서도 근무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아랫사람과 대화할 때도 절대 말을 놓지 않고 언제나 예를 갖췄다(초면에도 예사로 말을 놓은 모 대통령과 대비된다). 경호원과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내일 출범하는 동북아위원회 선장으로는 배순훈 사장이 좋겠다고 건의했더니 대통령은 “그리 갑시다”라고 선뜻 동의했다. 오랜 산고 끝에 드디어 동북아위원회 위원장이 결정됐다. 선장 없는 출범은 면했다. 후유! 천만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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