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반년 치 약 타들고 비행기에 올랐다···지방 환자들의 ‘약 처방’ 삼만리

민서영 기자 2023. 5. 1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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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초 학생들이 ‘우리 동네에 있으면 하는 시설’로 ‘큰 병원’을 꼽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코로나19(유행) 때는 비행기에서 간식을 못 먹으니까 장난감을 한 짐 챙겨갔어요. 또 발달장애 아이라 걸을 때 휘청거려서 유모차를 챙겨갈 때도 있었거든요. 아무튼 짐이 항상 많은데 아이가 알약이랑 물약 세 가지 약을 먹어서 6개월 치면 양이 어마어마해요. 큰 봉지로 두 개 정도? 그거를 짐으로 부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봉지 두 개를 비행기에 들고 탔어요.”

제주에 사는 최지연씨(38)에게는 7살 소아 뇌전증 자녀가 있다. 최씨는 2년째 아이의 치료와 약 처방을 위해 제주와 서울을 오간다. 어린아이와 함께 매번 서울로 가는 게 번거로워 병원에 갈 때마다 수개월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아온다.

많은 지방 환자들이 약물을 장기 처방받기 위해 서울로 향하고 있다. 광주에 사는 뇌전증 환자 조다정씨(29)는 “서울에 왔다 갔다 했던 당시에 내 몸에 맞는 약물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는데 부작용이 있으면 약을 처방 받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다시 서울 대학병원 예약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고 말했다. KTX로 서울을 오고가며 수개월 치의 ‘검은 봉지 한가득’ 약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조씨는 개별 포장을 포기하고 약통을 통째로 받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도권 의료기관서 장기 처방 4명 중 1명은 ‘지방 환자’

15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약물 장기처방 현황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수도권 소재 의료기관이 한 약물 장기처방(1회 처방 시 투여일수 360일 이상) 2280건 중 527건(23.1%)은 수도권 외 환자의 것으로 확인됐다. 같은 기간 전체 장기처방은 2871건이었다. 이중 79.4%(2280건)를 수도권 소재 의료기관이 담당한 셈이다.

수개월이나 1년 치 이상의 약물 장기처방은 주로 뇌전증 등 만성질환 환자들이 받는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뇌전증이 14.9%(63건)로 가장 많았고 이어 HIV 감염 6.8%(29건), 갑상선암 6.6%(28건) 순이었다. 뇌전증은 5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꾸준한 관리와 진료가 필요한 질환인데 많은 지방 환자가 집 근처 병원 대신 서울행을 택한다. 지역엔 서울만큼 많은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다정씨는 10여년전 뇌전증 최초 판정을 받을 때 전남 완도에서 지냈다. 조씨는 “부모님이 아시는 데가 있다더라”는 말을 믿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이후 집에서 가까운 광주의 병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았다. 완치 판정을 받았던 뇌전증이 재발하자 대학병원이 두 곳 밖에 없는 전남보다는 ‘빅5병원’ 등 유명한 대학병원들이 많은 서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최지연씨는 서울 유명 대학병원 출신의 의사가 있는 제주의 한 병원을 찾기도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의사가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최씨는 “세브란스에 계셨던 선생님이 있다고 해서 믿고 그 병원을 갔었는데 그 선생님마저 그만두니 (다시) 서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수도권 쏠림 현상은 모든 걸 민간의 자율에 맡긴 탓”

전문가들은 수도권 쏠림 현상의 원인으로 민간에 의존한 의료체계를 꼽는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부 교수는 “근본적으로 한국은 (의료 공급을) 전부 민간의 자율에 완전히 맡겨놓고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의료비 상승이나 의료 인력 불균형 등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한순간의 제도나 정책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라며 “공공병원 확대는 현 상황에서 한계가 있고, 의대 정원 확대 등을 통해 의료 공급자들이 (의료서비스 지역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여지가 줄어들면 낙수 효과로 지역 현실이 개선되겠지만 (의사들 반대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경실련강당에서 ‘필수의료 취약지 발표 및 공공의료 확충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보건복지부는 지역별·과목별 의료 불균형 해소를 위해 늦어도 내년 4월까지 의대 정원 확대를 확정할 계획이다. 하지만 의사 단체 등 의료계와의 논의는 더디다. 복지부는 올해 1월부터 의대 정원 확대 등을 두고 대한의사협회와 의료현안협의체를 총 8차례 열었지만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신 의원은 “약물을 장기처방하는 의료기관 상당수가 수도권에 위치해 이것이 의료 이용의 수도권 집중 현상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며 “지역 의료기관과 환자의 신뢰 제고를 유도해 지역의료를 활성화하기 위한 국가적 정책을 고안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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