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ML과 달라" 3년 리빌딩은 허황된 꿈…경질 4일 전, 수베로가 남긴 한마디
[OSEN=이상학 기자] 카를로스 수베로(51) 감독이 한화에서 경질 통보를 받기 4일 전이었다. 지난 7일 대전 KT전을 앞두고 수베로 감독은 감독실에서 취재진을 만났다. 경기 전 내린 비 때문에 덕아웃이 쌀쌀하자 감독실로 브리핑 장소를 옮겼다. 감독실의 선수 현황판 화이트 보드에는 그가 늘 강조하는 ‘신념’이라는 단어가 한글로 삐뚤삐뚤하게 쓰여져 있었다. 수베로 감독은 “내가 직접 썼다”며 웃었다.
그 아래에는 성공으로 가는 두 가지 그래프가 종이로 프린트돼 붙어 있었다. 하나는 일직선으로 우상향하는 그래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구불구불 꼬여 있지만 결국은 오른쪽 꼭대기로 향하는 그래프. 수베로 감독은 “사람들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 일직선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는 여기 어딘가에 있지만 분명 올라가고 있다”며 구불구불한 그래프를 가리켰다.
감독실에서 안경을 쓴 채 노트북을 바라본 수베로 감독은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조하는 팬그래프닷컴에 요즘 볼티모어 오리올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며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리빌딩에 성공한 팀들을 언급하더니 “KBO리그는 미국과 다르다”고 말했다.
말을 이어간 수베로 감독은 “수준이 다르다는 게 아니다.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를 보면 팀에서 육성시키는 선수 비율이 KBO리그에 비해 매우 낮다. 26인 로스터 중에선 12~14명 정도가 자체 육성 선수들로 나머지는 FA 계약, 트레이드, 룰5 드래프트로 구성된다. 반면 KBO리그는 신인 드래프트 영향이 절대적이다. 임팩트 있는 트레이드를 굉장히 보기 드물다”고 이야기했다.
매년 FA 시장이 열리지만 확실한 전력 상승을 보장할 대어급 선수는 많지 않다. 이마저 경쟁이 붙어 거액을 써야 영입이 가능하다. 메이저리그처럼 팀의 미래를 위해 베테랑 주축 선수들을 내주고 유망주를 받는 트레이드도 거의 없다. 트레이드는 오랜 시간 두고 평가해야 하지만 단기간 부메랑 효과로 돌아올 수 있어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비해 선수 풀이 좁고, 이동이 제한적인 한국에선 신인 스카우트와 육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 수베로 감독 지적이다. 그런데 이것도 만만치 않다. 수베로 감독은 “어린 선수들에게 실전을 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며 단계별 레벨에 맞춰 성장하는 미국 마이너리그와 다르게 2군 퓨처스리그 하나밖에 없는 KBO 구조상 유망주 육성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미국보다 리빌딩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수베로 감독은 2021년 부임 후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투타에서 거의 모든 선수들을 1군에서 한 번 이상 쓰며 고르게 기회를 부여했다. 당초 구단 주문대로 팀 성적보다 선수 성장에 초점을 맞췄다. 결과에 관계 없이 100타석을 보장하기도 했고, 승부처에서 투수를 교체하지 않거나 대타를 쓰지 않으며 젊은 선수들이 압박감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도록 참고 인내했다. 실패할 자유였다.
이 꽉 깨물고 시작한 리빌딩이지만 견디기 힘든 고통이 이어졌다. 2021년 첫 해 첫 10위로 마칠 때만 해도 희망을 봤지만 2년차부터 성적에 대한 압박이 들어왔다. 그런데 제대로 된 전력 지원이 없었다. 외부 FA 영입은 고사하고 방출 선수 영입에도 소극적이었다. 리빌딩 팀일수록 유망주들의 성장을 벌어주며 중심을 잡을 즉시 전력 베테랑들이 필요한데 그런 선수가 한화에 별로 없었다.
2년 연속 10위로 끝나자 성적을 내지 못한 수베로 감독을 향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성적이 나지 않으니 육성도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패배에 지친 팬들뿐만 아니라 함께 인내하기로 했던 구단 내부에서도 더는 기다리지 못했다. 지난해 시즌 후 수베로 감독 경질 논의가 있었지만 최종 단계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리빌딩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3년차 시즌에는 완전히 성적에 초점을 맞춰 준비했다. 모처럼 FA를 대거 영입하면서 전력 상승을 이뤘지만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가 겹쳐 성적 부진으로 이어졌고, 수베로 감독은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3년을 약속한 리빌딩 작업은 결국 이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3년 전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며 무늬만 리빌딩이 아닌 재창단 수준으로 시작한 진짜 리빌딩이었지만 끝을 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리빌딩이란 허황된 꿈이었다. 수베로 감독 말처럼 미국과 한국은 리빌딩에 있어 환경이나 구조가 달랐다. 무엇보다 구단의 방향성 유지가 달랐다. 볼티모어와 피츠버그는 리빌딩 기간 성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3~4년간 팀을 이끈 브랜든 하이드 감독, 데릭 쉘튼 감독과 재계약하며 연속성을 이어갔다. 올해 리빌딩을 끝내고 본격적인 순위 싸움을 하고 있다. 반면 3년 만에 방향이 바뀐 한화는 수베로 감독의 계약 기간을 지키지 못했다. 10개 구단밖에 없고, 외국인 선수 활약에 따라 매년 성적 변동폭이 큰 KBO리그에서 3년 이상 리빌딩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보여준 채 수베로 감독은 한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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