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탈북민’ 태영호는 왜 추락했나 [박찬수 칼럼]
박찬수 | 대기자
3년 전인 2020년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2명의 북한이탈주민을 당선권에 배치했다. 비례대표엔 함북 출신의 북한인권운동가 지성호씨 이름을 올렸고, 서울 강남엔 북한 고위직을 지내다 망명한 태영호씨를 공천했다. 탈북민을 한 사람도 아니고 둘씩이나 국민 대표자로 발탁한 이유는 자명했다. 반북 정서에 호소할 뿐 아니라, 당시 집권세력인 문재인 정부(민주당 정부)를 ‘종북 집단’으로 몰아가려는 선거전략의 극적인 표현이었다.
지성호 의원은 총선 직후 “북한 김정은 사망을 99% 확신한다”고 말했다가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북한 출신 국회의원이 얼마나 북한 내부정보에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최근엔 또다른 탈북민 출신 태영호 의원의 잇딴 설화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 4·3은 김일성 지시’라는 발언부터 대통령실 공천개입 논란을 부른 녹취록 유출까지, 결국 태 의원은 국민의힘 최고위원직을 스스로 물러났고 당원권 정지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영국 주재 공사를 지낸 엘리트 태영호 의원은 먹고살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여느 탈북자들과는 다르다. 그는 3만4천명에 달하는 남한내 탈북민 사회와 거의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뚝 떨어져 정부 경호를 받으며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됐고, 집권여당의 최고위원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태 의원의 갑작스런 추락은 그가 서울 강남에서 금배지를 달 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강의 남쪽’이란 일반명사가 아주 특별한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서울 강남의 정치적 대변자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아무리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한국에 온지 4년이 채 안된 북한 인사를 보수의 심장 격인 강남에 공천한 것 자체가 국민의힘이 얼마나 포퓰리즘적인가 보여준다.
태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재산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재산은 18억원을 넘었고, 20대 자녀 두명은 벌써 1억4천만원씩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재산을 어떻게 형성한 것인지 밝힌 적이 없다. 고급 정보를 가졌으니 거액의 정착금을 받았을 수 있고, 북한정권 속살을 엿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를 썼으니 인세와 강연료로 모았을 수도 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의 재산형성 과정을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다만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이 그토록 ‘종북’이니 ‘민주화운동 기득권세력’이니 비난해온 민주당의 586 다선 의원들 재산이 대개 10억원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놀라운 자본주의적 재능인지 알 수 있다.
미확인 북한 정보를 유포하며 남북 긴장을 부추기는 일부 ‘북한해방 운동가’들에 비하면 태 의원은 비교적 온건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강성으로 바뀐 건 한국 보수정당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름 깨달았기 때문일 터이다. ‘제주 4·3은 북한 김일성 지시’라는 발언은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당원들 지지를 받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그를 아는 복수의 인사는 말했다. 이 전략이 맞아떨어져 최고위원이 되자, 그는 ‘김구는 김일성에 이용당했다’ ‘미친개는 몽둥이가 답’이란 식의 극우 보수를 겨냥한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용산 대통령실은 한 술 더 떠, 태 의원을 야당 공격의 선봉으로 활용하려 했다. “당신이 최고위원 있는 기간에 잘하면 공천 그거 신경 쓸 필요도 없어(라는 말을 이진복 정무수석한테 듣는 순간), 내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라는 태 의원 말을 듣고 있자면, 아무 기반 없는 그가 정치적 생존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 총선에서 이념투쟁의 전면에 내세우려 태씨를 서울 강남에 공천했고, 점점 더 강성으로 흐르는 당원들은 제주 4·3발언을 한 그를 최고위원으로 밀어올렸다. 대통령실은 내년 총선 공천을 미끼로 그를 활용하려다, 그만 녹취록 파문으로 모든 게 헝클어진 것이다.
2020년 태영호씨를 강남에 공천한 정당(미래통합당)은 지금 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8년 18대 총선 때는 ‘한나라당’, 2016년 20대 총선 때는 ‘새누리당’이었으니 거의 전국선거 치를 때마다 이름을 바꾼 셈이다. 당 이름만 보면 보수정당의 정체성은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는데, 갈수록 극단적 우익으로 흐르는 분위기는 왜 그런건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진보 세력과 민주당은 ‘종북’이라는 인식 때문일까. 그 최전선에 섰던 태영호 의원의 추락은 그래서 조금은 안됐고 씁쓸하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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