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의 쓱크랩북] 심장은 함부로 평가하는 게 아니다… 기적의 사나이, 세상에 없었던 ‘특별한 문단속’

김태우 기자 2023. 5. 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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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용은 세 번의 실패를 거치며 더 강한 선수로 성장했다 ⓒSSG랜더스
▲ 서진용은 시즌 첫 19경기에서 16세이브를 거두는 동안 아직 자책점이 하나도 없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2017년 시즌에 들어가기 전, 트레이 힐만 당시 SK 감독은 자신의 방으로 한 선수를 호출했다. 아주 중요한 통보를 하려는 참이었다. 감독의 호출에 어리둥절 문을 열고 들어온 선수는 바로 서진용(31‧SSG)이었다. 힐만 감독은 “올해 네가 팀의 마무리를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입을 열었다. 서진용이 아직도 기억하는, 가슴 떨렸던 그 순간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SK의 마무리 투수는 확실하지 않았다. 제각기 장점이 있었고, 달리 말하면 확실한 마무리 감이 없었다. 힐만 감독은 서진용의 강력한 구위에서 그 희망을 느꼈다. 베테랑 선수들을 제쳐두고 서진용에게 마무리를 맡긴 이유였다. 일각에서는 강력한 구위파 마무리를 선호하는 ‘미국식’ 스타일이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분석도 오갔다. 힐만 감독은 “공이 좋으니 지금처럼 던져라”고 딱 하나를 당부했다.

서진용도 설레는 마음으로 2017년 시즌에 돌입했다. 근사한 보직이 자신의 이름 앞에 있었다. 어린 선수가 느꼈을 뿌듯함이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세이브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이 패기 넘치는 투수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첫 번째 좌절… 다들 그랬다, ‘새가슴’이라고

경남고를 졸업하고 2011년 SK의 1라운드(전체 7순위) 지명을 받은 서진용은 당시 드래프트의 ‘깜짝 지명’으로 불렸다. 고교 시절 투수로 전향해 투수 경험도 많지 않았고, 완성도도 그다지 높지 않은 선수였다. 이런 선수에 1라운드 지명권을 태운 건 다 이유가 있었다. SK는 당시 고교 시절 많이 던지지 않아 싱싱한 어깨와 운동능력에 주목했다. 지금 당장보다는 미래를 위한 픽이었다.

투수로서 기본기부터 강훈련을 받은 서진용은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군 복무를 하며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고, 제대할 즈음에는 시속 150㎞를 던질 수 있는 우완 파이어볼러로 팬들의 큰 기대를 받았다. 당시 SK 사령탑이었던 김용희 감독도 시원시원하게 공을 던지는 서진용의 잠재력을 단번에 알아보고 중용하려 했다. 2015년 1군에 곧장 데뷔했다. 하지만 시련이 곧 찾아왔다. 팔꿈치 인대에 문제가 있었고, 첫 시즌을 완주하지도 못한 채 팔꿈치인대재건수술(토미존서저리)을 받았다.

2016년 복귀해 예열을 마친 서진용은 힐만 감독의 낙점을 받았다. 마무리 경력이 한 차례도 없고, 심지어 필승조로도 한 시즌을 완주하지 못한 서진용에게 마무리를 맡긴 건 파격적이었다. 결국 선수가 하기 나름이었다. 그러나 서진용은 그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긴장감에 자기 공을 던지지 못했다. 보는 사람마저 불안했다. 결국 블론세이브만 저지른 채 마무리 보직을 내놨다. 앞으로 길게 이어지는, ‘마무리로서의 좌절’에 첫 챕터를 쓰는 순간이었다.

▲ 서진용은 2017년과 2021년 시즌 중간 마무리 보직을 내놓는 시련을 겪었다 ⓒSSG랜더스

사실 자신은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캠프 때 공이 좋았다. 서진용은 “캠프 때는 잘 던졌다. 토미존 수술 후 완전히 팔 상태가 좋아지고 내 팔처럼 느껴지는 데 2년의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는데 그때는 딱히 아프고 그런 적도 없었다”고 떠올렸다. 하지만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 주자만 나가면 얼굴이 상기되고, 땀이 줄줄 흐르기 일쑤였다. 마무리가 상대 팀에 줘야 할 압박감은 없었던 반면, 모든 동료들과 팬들이 서진용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붙은 ‘새가슴’이라는 오명을 털어내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결국 힐만 감독은 자신의 구상을 꺾었다. 마무리 박탈 통보를 받던 날을 서진용은 아직도 기억한다. 서진용은 “감독님께서 ‘네가 계속 (그 보직에) 있어줬으면 좋겠고, 함께하고 싶지만 잠깐 쉬었으면 좋겠다. 계속 하다가 스스로 많이 힘들어하기보다는 조금 쉬고 다시 돌아와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고 담담하게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자신의 도전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지는 상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좌절… “서진용은 안 돼, 마무리는 아니야”

2017년 마무리 보직에서 떠난 뒤 서진용은 불펜에서 자신의 몫을 잘 수행했다. 2018년 성적은 조금 아쉬웠지만, 2019년에는 하재훈 김태훈과 함께 철벽 불펜진을 구성하며 리그 홀드 부문 2위까지 올랐다. 그간의 부정적인 시각을 한 방에 싹 날린 시즌으로 서진용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만을 생각하던 그 때, 다시 마무리 보직이 서진용의 이름 앞에 붙었다.

SK는 2020년 시즌 초반부터 큰 부진에 빠졌고, 불펜 또한 전년도 구원왕이었던 마무리 하재훈이 어깨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염경엽 감독이 현장에서 이탈해 팀 분위기 자체까지 어수선했다. 시즌 중반이 되자 어차피 5강은 어려운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다음 시즌을 생각해야 했고, 하재훈의 부상 장기화 속에 새 마무리를 다시 세워야 했다. 당시 박경완 감독대행과 코칭스태프의 결론은 다시 서진용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만큼 꾸준하게 활약한 불펜 투수가 없었다. 박 대행은 “앞으로 마무리를 해야 할 선수”라고 했다.

2020년 남은 시즌 마무리로 8세이브를 거뒀고, SK 와이번스라는 이름을 달고 마지막 세이브를 거둔 선수로도 역사에 남았다. 2021년 시즌을 앞두고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김원형 현 감독도 서진용의 재능과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SK 코치 시절 어린 서진용을 지도하고 엄하게 다잡았던 이도 바로 김 감독이었다. 지난해 마지막 기조를 그대로 이어 가 서진용을 마무리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또 여기서 ‘슬로스타터’ 오명이 붙었다.

시즌 초반 몸 상태가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다. 김상수가 대체로 마무리를 맡아야 했다. 5월 이후 다시 원래 구상대로 마무리를 맡았지만 불안한 날도 적지 않았다. 결국 생애 첫 두 자릿수 세이브를 하나 남겨둔 채 9월 초 마무리 교체 통보를 받았다. 팀이 갈 길이 바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졌다. 김택형이 마무리를 맡았고, 서진용은 다시 불펜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좌절이었다. 시즌 초의 더딘 시작이 결과적인 패착이 됐다.

▲ 서진용은 2022년 개인 최다 세이브를 경신했지만 기세를 끝까지 이어 가지 못했다 ⓒSSG랜더스

서진용은 “사실 중간으로 나갈 때나 마무리로 나갈 때나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케이, 여기까지 왔으니 잘 던지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에서 내가 스스로를 많이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위기 상황이 오면 스스로를 옭아맸다. ‘맞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고, 그런 것들로 인해 더 위축되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상황이 됐다”면서 “혼자 안 맞으려고 도망 다니는 피칭을 하다 주자를 모아놓고 뻥 하고 맞는 그런 게 많았다“고 돌아봤다. 스스로를 믿지 못했고, 그 결과는 다시 마무리 보직 박탈이었다.

2022년에는 조금 반대였다. 개막 마무리로 시작한 김택형이 5월 이후 부진했고, 중간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었던 서진용에게 다시 마무리 보직이 찾아갔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마무리 보직’이었다. 좋은 활약을 하며 개인 최다인 21세이브를 기록했지만 역시 완주 상장을 받지는 못했다. 시즌 막판 구위 저하를 이겨내지 못하고 마무리 자리를 다시 내놨다. SSG는 노경은 문승원 김택형 등 여러 선수들을 돌려쓰며 마지막 한 달을 버텨야 했다.

체력이 떨어졌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서진용은 “홀드 부문에서 리그 1‧2위를 하다가 마무리로 갔다. 처음에는 잘 던졌다. 나쁘지 않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힘이 조금 떨어졌다”면서 “내가 특급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몇 년 동안 꾸준하게 던졌다고는 생각한다. 체력적으로 조금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런 전체적인 그림은 몰라주고, 그냥 ‘안 좋다’, ‘실패했다’ 이런 이야기만 하니까 아쉬웠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이제 더 이상 마무리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네 번째 기회, 심장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2023년 시즌을 앞두고 SSG는 마무리 보직을 놓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김택형이 입대했고, 노경은은 한 살을 더 먹었다. 문승원은 원래 보직인 선발로 준비하고 있었다. 플로리다 캠프 당시 김원형 감독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올해 마무리는 누구입니까?”였다. 김 감독은 그럴 때마다 “아직 고민 중”이라고 했지만, 내심 정해놓은 후보는 있었다. 플로리다 캠프 말미, 김 감독은 비보도를 전제로 “진용이를 생각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그 시각, 아직 통보를 받지 못한 서진용은 필승조 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력 때문일까. ‘마무리’라는 세 글자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조차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겠다고 다짐했다. 당시를 떠올리는 서진용은 “캠프 때 마무리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한편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던지는 게 거의 뒤쪽(7~9회)이니까 생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몸도 더 빨리 끌어올렸다.

슬로스타터라는 오명이 있었던 서진용이다. 이건 김 감독도 대놓고 강하게 지적한 부분이었다. 서진용은 “이전에도 몸을 빨리 만드는 경우는 많았다. 그런데 좋은 밸런스를 빨리 찾는 것과는 별개였다. 몸은 100%가 아닌데 공은 100%를 던지고 싶은 욕심이 있으니 당연히 밸런스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런데 차근차근 맞춰서 단계를 올려가니까 개막에 그 컨디션에 밸런스가 딱 맞춰지고 좋은 공이 나왔다. 지난해 초반과 올해 차이는 딱 그것 하나”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의 믿음에 고마워했다. 믿고 맡겨줬는데 시즌 첫 경기부터 130㎞대 구속을 던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첫 등판이었던 4월 1일 인천 KIA전. 전광판에 148㎞의 구속이 찍히자 서진용은 내심 “됐다”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 이후 거침없는 세이브 행진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15일 현재 19경기에서 19⅓이닝을 던지며 단 하나의 자책점 없이 16세이브를 쓸어 담았다. 피안타율은 0.159, 이닝당출루허용수(WHIP)는 1.09다. 자타 공인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마무리 투수다.

▲ 서진용의 사례는 선수의 기량이나 마인드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SSG랜더스

세 번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네 번째 성공의 근사한 거름이 됐다. 서진용은 “어쨌든 갈수록 경험들이 쌓였던 것 같다. 지금은 ‘그래 뭐 치려면 쳐라’라며 그냥 더 강하게 던지고 붙는다. 그게 결과가 좋아졌다”면서 “이전과 지금은 솔직히 달라진 건 없다. 기술적인 문제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단지 스트라이크존 끝을 보는 게 아니라 가운데로 지나가게끔 계속 힘 있게 던진다. 그냥 그 차이다. 그리고 좋은 밸런스를 유지하는 정도”라고 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6년 동안 지독하게도 앓으면서 쌓인 교훈이다.

중간 투수는 뒤가 있지만, 마무리는 뒤가 없다. 자신이 무너지면 팀은 진다. 당연히 누구보다 더 큰 중압감과 싸워야 한다. 아무리 좋은 공을 가진 선수도 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면 9회에 살아남을 수 없다. 실제 그런 사례는 리그 역사에 차고 넘친다. “마무리의 심장은 타고 난다”는 말을 하는 이유다. 그리고 서진용은, 어쩌면 리그에서 이 명제를 가장 제대로 증명하고 있었던 선수였다. 공은 마무리지만, 심장은 마무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심장은 후천적으로 길러질 수도 있고, 혹은 하나의 계기로 원래 갖춰져 있던 것이 금세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서진용이 증명하고 있다. KBO리그 역사에 세 번이나 마무리 보직을 박탈당한 뒤, 다시 일어나 자리를 잡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장은 타고 난다’는 기존 명제에 ‘그래서 더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문구를 추가한 서진용은 SSG가 선수들을 보는 눈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할 중요한 스크랩이 될 것이다. KBO리그에 없던 마무리, 서진용의 문단속이 더 특별한 이유다. /SSG 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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